[은퇴하고 산티아고] 피레네의 비는 수직으로 내리지 않는다

김상희 2025. 7. 1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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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길의 첫 코스, 피레네 산맥 넘던 날

2025년 4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산티아고 길 걷기를 다녀왔습니다. 중년 한국인들이 많아 놀랐습니다. 산티아고 길은 열풍을 넘어 '산티아고 현상'이 되었음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 길 위의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기자말>

[김상희 기자]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에서의 첫날 운토(Huntto) 숙소에서 아침을 해 먹고 나올 때가 8시쯤이었다. 비가 뿌린다. 배낭에 방수 커버를 씌우고 비옷을 꺼내 입고 걷기 시작했다. 배낭 무게에 간식까지 더해져 내 짐은 6킬로그램이 넘는다. 애초에 나보다 짐이 더 무거웠던 일행 세 사람은 8킬로그램은 족히 되는 각자의 배낭을 메고 빗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 피레네 산맥을 넘는 순례자들
ⓒ 김상희
어제 두 시간 남짓 걸으며 봤던 아름다운 피레네는 어디로 갔을까? 굽이굽이 펼쳐져 있던 연두 초록한 산등성이, 키 작은 야생화 꽃밭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 앞엔 안개를 헤치고 걸어내야 하는 빗길의 언덕뿐이었다. 이래서 미국 시인 제프 건디는 말했나? '나는 화창한 날에 신을 더 찬미했다.'
피레네의 비는 중력의 법칙대로 내리지 않았다. 피레네는 비가 지구 중심 방향인 지표에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한 곳이었다. 30도 훨씬 넘는 각도로 방향을 제멋대로 바꿔가며 뿌렸고 안개마저 자욱했다.
 비바람과 안개를 헤치고 피레네를 넘는다
ⓒ 김상희
비 속을 두 시간쯤 걸었을까? 방수된다는 고어택스 신발과 무릎 아래까지 뒤집어쓴 비옷도 소용이 없었다. 하의는 물론 발이 다 젖었다. 방수 신발? 포장된 길에서 비가 조금 내릴 때만 방수 신발일 수 있다는 걸 이때 처음 깨달았다.

사선으로 흩뿌리는 비는 바지부터 적셨다. 바지에 스며든 물이 무거워면서 발목을 타고 내린다. 이 물이 양말의 발목부터 발가락까지 적신다. 마침내 신발은 물로 첨벙거린다. 이상이 발이 빗물로 초토화되는 과정이다.

발이 완전히 젖으니 체념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덜 젖으려는 신경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제부터는 젖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손이 시리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배낭에서 플리스 조끼를 꺼내 입고 상체의 체온으로라도 몸 전체 체온이 떨어지는 걸 막으려고 애썼다.

저체온과 싸우며 빗길을 오르다가 구세주를 만났다. 저 멀리 뿌연 안개비 속에 푸드 트럭이 서 있는 게 아닌가. 핫초코를 마시니 속이 따뜻해졌고 살 것 같았다. 얼굴이 파랗게 된 채 앉아 떨고 있던 서양 여자 한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승용차 한 대를 타고 갔다. 저체온증인 것 같았고 푸드 트럭 주인이 차를 호출해 주었다고 했다.
 피레네 산맥에서 만난 푸드 트럭
ⓒ 김상희
기운을 회복한 뒤 다시 빗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한 무리를 만났다. "지금 네가 가는 길이 틀렸어. 되돌아가야 해"라고 하며 지도를 보여 주었다. 이 무슨 날벼락?

그때부터 우리는 물론, 앞서 가던 사람들과 뒤에 오던 사람들 모두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푸드 트럭 직후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쪽 길로 접어든 게 문제였다. 갈림길조차 인지 못하고 앞 사람 발 뒤꿈치만 보고 걸었으니... 우리가 접어든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이었다.

사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루트는 산티아고 길 34개 코스 중 가장 힘든 코스로 꼽힌다. 좋은 날씨에 넘어도 힘든 길을, 비바람 속에서 '갔던 길 되돌아 걷기'까지 했다. 산티아고 첫날의 호된 신고식이다.

최고봉 레푀데르 언덕(Lepoeder, 1,450m) 후의 내리막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빗속을 걷는 것에 이미 체념한 데다 끝이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희망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피레네 하산길, 질척이는 빗길과 새순오른 숲을 헤치며
ⓒ 김상희
피레네를 넘어 하산하는 동안 '지금 나를 괴롭히는 괴로움에도 참 종류가 많다'라고 생각했다. '젖은 신발로 걷는 찝찝함, 추위, 배고픔, 땀과 빗물에 뒤범벅된 몸, 어깨를 짓누르는 짐, 아픈 다리...' 이 모든 것들 중 일등은 뭘까? 신(神)이 만약 단 하나의 괴로움만 들어준다면 난 뭘 요구해야 할까?

주저없이, '젖은 발로부터 벗어나기'를 말하겠다. 신이 나의 최대의 괴로움으로부터 나를 구해준 곳은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숙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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