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 자격증 따며 선수 마음 달랜 '홍원기' 키움 감독, 잠시만 안녕
[황혜정 기자]
늘 조용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뜨거웠다.
중계 화면 속, 선글라스를 낀 채 조용히 메모하는 감독. 더그아웃 가장자리에서 누군가의 호수비에 박수를 치고, 아쉬운 타구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기에 때론 차가워 보였지만, 그가 진짜로 바라보고 있던 건 언제나 '선수의 마음'이었다. 키움히어로즈 홍원기 감독의 얘기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이름을 '전' 감독으로 불러야 한다. 키움 구단은 14일, 공식 발표를 통해 홍원기 감독·고형욱 단장·김창현 수석코치에게 보직 해임을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진 날, 구단 안팎은 숙연했고, 선수단과 팬들 사이에는 긴 여운이 남았다. 서울 히어로즈 시절인 2009년부터 16년간 히어로즈에서만 지도자 생활을 해오며 팀을 조용히 지탱해 온 지도자와의 이별이다. 단순한 성적이나 순위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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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5 프로야구 키움 히어로즈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의 홍원기 감독. |
| ⓒ 연합뉴스 |
거기엔 공식 기록지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적혔다. 누군가의 잘 맞은 아웃 타구, 미세한 수비 위치 실수, 호수비 뒤의 반응, 투수 코치의 마운드 방문 횟수. 수비 코치 출신답게 그는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도 손으로 적으며 경기를 되짚었다.
그 노트는 단지 복기용이 아니었다. 선수를 평가하려는 기록이 아니라, 선수를 이해하고 기억하려는 도구였다. "좋았던 장면을 기억하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노트에는 숫자 대신 신뢰와 배려가 남아 있었다.
홍 감독은 코치 시절이던 2019년, 프로야구 지도자 중 처음으로 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딴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석코치 시절 인터넷 강의를 들어가며 시험까지 봐 상담사 자격증을 땄다. 이유를 물으면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선수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흔들리는 젊은 선수에게 "볼넷 주지 마" 대신 "안타 맞고 실점해도 괜찮아"라고 말하곤 했다. 부정적 단어가 선수의 머리에 남을까 염려돼 '볼넷', '제구'라는 단어 사용도 자제했다. 어린 신인 선수에게도 꼬박꼬박 'OO선수'라고 존칭을 붙이며 구단 직원이나 기자들이 '저 친구, 쟤'라고 부르는 것을 정중하게 정정하기도 했다.
1350분, 성적표 없이 이어진 면담들
2024시즌을 앞두고, 홍 감독은 군보류 선수를 제외한 1·2군 전원과 1대1 면담을 진행했다. 홍 감독이 사령탑으로 오르고 난 뒤 매년 하는 상담이기도 하다.
총 1350분, 22시간 30분 이상. 그것도 선수당 최소 30분이라는 기준 아래 이뤄졌다. 몇몇 선수와는 한 시간 넘게 선수가 쏟아내는 이야기를 경청하기도 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 야구라는 스포츠 특성상 방대한 통계 자료가 있음에도, 홍 감독은 빈손으로 면담장에 들어간다. 성적표와 기록표 대신 '귀' 하나만 가지고 말이다. 그는 상담을 매년 이어오는 이유에 대해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떠나는 선수들이 많아서요"라고 답했다.
당시 면담을 마치고 나온 젊은 선수들에게 소감을 물었을 때 선수들은 하나같이 "답답했던 마음을 내려놨다", "감독님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고백했다. 한 신인 선수는 "대나무가 자라려면 뿌리에 3년이 걸린다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홍 감독은 그런 말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독으로서 뿌듯하다"고 했다.
홍 감독은 2022년 키움을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며 지도력도 증명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성과는,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모든 선수를 존중하고 이름을 불러준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이번 해임은 어쩌면 성적이나 구단 재편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명의 지도자가 선수들에게 남긴 '온기'는 숫자나 기록으로는 환산할 수 없다.
비밀노트의 마지막 장엔 무엇이 적혀 있을까. 홍 감독은 끝까지 이 내용들을 비밀에 부쳤지만, '수비 실수, 하지만 좋은 위치 선정' 혹은 '3삼진, 그러나 피하지 않고 끝까지 스윙' 아니면 '오늘도 정면 승부를 당차게 한 선수'라고 기록돼 있을 것이다.
2025시즌 후반기부터 홍원기 감독은 더 이상 키움의 더그아웃에 없다. 그러나 그가 심어놓은 마음의 야구, 사람의 야구는 여전히 그라운드 위에 살아 숨 쉴 것이다. 선글라스 너머의 따뜻한 눈, 노트 한 장에 담긴 존중과 애정,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위로를 전했던 감독. 그의 작별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히어로즈 한 시대의 조용한 퇴장이다. 아디오스 홍원기! 잠시만 안녕!
한편, 키움 구단은 17일부터 시작하는 삼성 라이온즈와 후반기 첫 경기부터는 설종진 퓨처스(2군)팀 감독이 1군 감독 대행을 맡는다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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