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신 세 번이나 고통받은 섬의 '쑥대밭' 연대기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그 옛날 강화도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앉은 자리가 지운 운명 탓이다. 수려한 산세와 넓고 기름진 들판은 이를 감내하라는 조물주의 선물이다. 푹푹 빠지는 갯벌과 세차게 흐르는 물살은 천연 방어막이다. 지독한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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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성과 외성(1872년지방지도_부분) 좌측 강화읍성에 길(붉은 실선)을 따라가면 제물진이다. 제물진에 '갑곶돈'과 '진해루'가 보이고 바닷가를 따라 긴 외성이 그려져 있다. 진해루에서 뱃길이 문수산성 '공해루'에 가 닿아 있어 군사적으로 연합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이곳을 앗기면 나라 존망이 흔들거렸다. 평화로운 시대라면 거짓이다. 하지만 위급과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닥뜨리면 바로 표변했다. 오로지 안녕을 갈구하며 도망쳐오기 바빴다. 그랬기에 지배 세력에게 강화는 숨겨둔 꿀단지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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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과 섬 동북쪽 강화읍성 남장대 오르는 성벽에서 바라 본 광경이다. 왼쪽이 산에 싸인 읍성이다. 그 뒤로 한강과 임진강, 강화해협이 만나는 바다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섬이 '유도'다. 우측 뱀처럼 긴 물줄기가 강화해협인 염하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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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진해루 강화읍성에 잇닿는 길목, 염하의 외성에서 관문 역할을 하던 진해루의 구한말 모습. |
| ⓒ 이영천(현장안내판) |
고려, 폐허가 된 궁궐과 성곽
백성에게 몽골 침략은 가공할 공포였다. 무신 정권에도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강화로 도망치듯 천도한 그들이 제일 먼저 손댄 건 호화로운 생활이었다. 성벽과 돈대를 쌓거나 무기 마련이 최우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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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성 동문 읍성의 동쪽에서 강화 동북쪽의 여러 돈대와 진(鎭)으로 통하던 문. 강화중학교 옆에 있어, 이 문으로 걸어 학교에 가는 학생들 모습이 인상적이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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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 읍성 남장대 오르는 길에서 바라 본 강화읍. 사진 가운데 산 아래, 연초록으로 빈 공간이 고려 궁지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왜 저 자리를 궁지로 택했는지 이해가 된다. |
| ⓒ 이영천 |
1270년 고려 원종이 몽골과 화친을 맺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무신정권의 뿌리를 이으려는 삼별초는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그 대가로 강화 고려궁궐과 성곽은 폐허로 되어야만 했다. 강화의 첫 아픔이다.
조선, 삼전도 굴욕과 강화읍성 초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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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성 북문 강화 송악산 능선을 타고 이어진 북쪽 성벽의 골짜기에 북문이 앉았다. 주변은 강화 시민들의 산책로 우거진 녹음이 싱그럽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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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장대 강화읍성의 장대 셋 중 유일하게 복원(2010)된 남장대. 읍성 남산 정상에 앉았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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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성 남문 강화읍성의 정문 역할을 하던 남문. 이 문을 통해 제물진의 진해루와 갑곶돈대로 통했다. 진해루에서 뭍의 김포 통진과 문수산성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사진 왼쪽이 남산으로 오르는 성벽이다. |
| ⓒ 이영천 |
망국의 전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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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 장구통 모양의 강화읍성. 1677년 고려 때의 중성을 바탕으로 쌓은 석성이다. 3곳에 장대를 두어 장기 농성이 가능하게 하였다. 행궁과 외규장각 등이 있었으나, 지도엔 생략되었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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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루 강화해협에 쌓은 외성의 관문 역할을 하던 진해루. 사진 속 옛 강화대교와 지금의 강화대교 사이에 초라하게 복원되어 있다. 가까이에 갑곶돈대가 있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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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문과 연무당 터 강화읍성 서문이다. 도로가 지나는, 잘린 성벽 좌측이 연무당 터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아픔의 장소다. 멀리 남산으로 오르는 성벽이 아련하다. 남산 정상엔 남장대가 있다. |
| ⓒ 이영천 |
그리고 150년이 흘렀다. 강화를 이젠 서울의 목구멍이라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화는 과연 행복해졌을까. 그러길 빈다. 섬에 지운 운명처럼, 강화의 비극은 곧 우리의 비극이었다. 이를 치유하는 길은, 끝까지 기억하며 지켜내는 일이다. 그게 역사를 대하는 바른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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