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박사 할아버지와 12살 소녀의 '완벽한' 우정
[김상목 기자]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제법 명성 높은 식물학자 '동호'는 은퇴 후 너른 단독주택에서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 잇는 중이다. 혼자 살기엔 너무 큰 집 곳곳엔 야생화가 피어나고, 도시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야생 꿀벌이 날아다니는 풍경이 고즈넉하기만 하다. 장성한 자식들은 그의 곁을 떠났는지 인적이 드물지만, 동호는 꾸준히 연구와 조사에 열중하는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12살 소녀 '봄'이 말벌에 물렸다며 봄의 엄마가 경찰을 대동하고 동호의 자택에 난입한다. 한바탕 드잡이를 할 기세였지만, 경찰의 만류와 말벌집 증거 확보에 실패한 엄마는 씩씩대며 떠나간다. 뜻밖의 봉변을 겪었으나 그저 허허 웃으며 넘어갈 뿐인 노학자이지만, 며칠 후 또다시 그의 집에 잠입한 봄과의 대면은 새로운 계기가 된다. 여관방에서 엄마가 일하러 가면 늘 혼자 지내던 소녀는 누에를 키우는 참이다. 하지만 먹이가 되는 뽕잎이 떨어지자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동호의 집에 뽕잎을 찾아온 것이다.
그날 이후 동호와 봄은 함께 동네 뒷산을 오르며 식물 탐험을 시작한다. 식물 박사 할아버지와 어울리며 봄은 마음의 문을 열고, 외롭게 지내던 동호 역시 주변 동식물에 관심 많은 소녀가 대견하다. 둘은 함께 지역 생태계를 복구하려는 시도인 '씨앗 폭탄' 제조에 열중한다. 한편 봄은 학교 과제인 연극 공연에 누에의 성장을 주제로 삼으려 애쓴다.
그렇게 세대와 배경을 초월한 둘만의 우정이 무르익어 가지만, 봄에겐 동호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다. 그 사정 때문에 봄은 갑자기 사라지고, 동호는 염려하는 마음에 봄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수소문한다. 마침내 그가 알게 된 봄의 상황은 그동안 속세를 초탈한 듯 살아온 동호의 마음을 뒤흔들고도 남을 일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간직해 온 신념과 소중한 벗을 구하기 위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은밀한 계획을 감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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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화원> 스틸 |
| ⓒ 미디어나무(주) |
문득 동호의 눈에 들어온 '만병초'는 자신이 알던 품종과 조금 달랐다. 남한엔 없을 거라며 가이드가 설명해준 특성에 매료된 그는 문익점이 붓 뚜껑에 몰래 목화씨를 담아오듯 귀국할 때 비밀리에 노란 만병초 씨앗을 들여온다. 하지만 몇 년 동안 꾸준히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싹은 제대로 틔우지 못한다. 백두산의 고랭지에서 진화한 특별한 품종은 과거와 달라진 남한 기후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가 불러온 식생 변화를 일깨우려는 장치다.
공을 많이 들인 티가 역력한 동호와 봄의 뒷산 생태계 탐험은 별생각 없이 우리가 지나치던 주변 환경에 관한 관심을 불러오는 흥미로운 모험으로 묘사된다. 척척박사 동호 덕분에 봄은 자신이 처한 고립된 환경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경이를 체험하며 숨 쉴 틈을 얻는다. 동호 역시 권태롭던 일상에 한 줄기 빛이 내리쬐듯 삶의 활력을 복원한다. 이대로만 계속 이어지길 영화를 보던 관객들도 기원할 만큼.
제목의 '비밀의 화원'은 영화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될까? 첫 번째론 동호의 마치 요새와도 같은 자택 한구석에 마련된 작은 식물원 같은 공간이다. 이곳은 동호와 봄이 공유하는 씨앗 폭탄 프로젝트가 준비되고, 진귀한 모종이 성장하길 기다리는 장소다. 이 작은 테라스 공간이 영화 속 첫 번째 '비밀의 화원'으로 작동한다.
두 번째는 어디일까? 모르고 지나칠 이들에겐 대수롭지 않겠지만, 두 사람이 탐험을 떠난 동네 뒷산 곳곳이 또 다른 '비밀의 화원'이 될 테다. 그 공간에 깃든 가치는 진가를 이해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만 개방된다. 처음 보는 돌연변이 제비꽃, 인위적으로 유입되어 고유의 식물계를 잠식하는 덩굴의 위협, 야생과 재배의 경계선이 둘에게만 활짝 열린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 어쩌면 세 번째 공간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완벽한 형태로 말이다.
일본의 주목받는 차세대 거장 미야케 쇼의 작업 중에 겹치는 게 문득 떠올랐다. 감독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와일드 투어>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혼합된 형식도 이채롭지만, 이야기의 출발점이 지역 아트센터의 방학중 청소년 교육 프로젝트, 'DNA 도감' 작업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한창 성적이나 게임, 온라인 콘텐츠에만 빠져 살던 중학생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 곳곳을 누비며 생물종 다양성을 확인하는 풍경은 그들이 속한 세계가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란 각성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물론 그런 야외활동 가운데 인생사 희로애락이 깃드는 것 역시 당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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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화원> 스틸 |
| ⓒ 미디어나무(주) |
그렇게 영화는 식물종과 성장 과정의 청소년,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여성을 일체화하며 인간이 자신이 속한 땅의 생태계를 어떻게 대할지와 공동체의 기능을 외면한 채 상호 고립으로 치닫는 사회적 사각지대를 병치하려 한다.
근래 환경 주제 영화에서 드러나는 면모,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 대립 항으로 설정하지 않고, 자연이 훼손되면 인간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 세상의 자유와 평등, 공동체 복원이 자체로 순환하는 생태계의 양상과 동등하게 돌아간다는 환기가 본 작품에서도 중요한 테마로 다뤄진다.
물론 구성 측면에서 아쉬움은 남는다. 고심해서 설정한 한반도 자연 생태계의 면모와 스며들 듯 각인되는 식물계 구성과 비교하면, 중반 이후 급속하게 진행되는 봄 가족의 감춰진 내력은 작품의 주제의식 면에선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나, 살짝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감이 있다. 면밀하게 주제의식을 파악하며 뒤따르지 않던 관객에겐 흡사 장르가 바뀐 것처럼 다가올 대목이다.
물론 만물의 속성이 서로 통한다는 전제 아래, 동호가 다시 퍼뜨리려는 희귀종 식물과 사회가 지켜야만 할 미래 세대의 씨앗은 본질적인 면에서 다르지 않음을 영화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지만, 누에 & 오디 & 봄이 하나로 수렴되는 생명의 연속성에 비하면 주인공이 선택하는 비밀작전의 파격적인 내용은 해결 수단으로 반드시 최선인가 반문하게 만든다. 작품이 전하려는 주제를 강조하려 개연성을 일정하게 포기한 탓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취하는 해결책은 의외로 급진적이다. 대개 생태계는 그 자체의 수용력으로 인위적 개입만 없다면 알아서 시간이 지나면 만물을 포용하리라 믿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호와 봄 모두 다른 지점에서 출발해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다른 존재를 해치는 종은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된다는 방어권의 도입이다. 그런 결론에 따라 상당히 파격적인 방책이 투입되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옳다는 결론으로 이야기는 귀결된다. 이는 관객의 판단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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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의 화원> 스틸 |
| ⓒ 미디어나무(주) |
영화 도입부에서 동호가 매료된 백두산의 자연 묘사는 관객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컴퓨터 그래픽을 은근히 적지 않게 투입한 도시 생태계 묘사 역시 저예산 독립영화의 한계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어릴 적 주변에서 종종 봤거나, 혹은 영화 속 봄처럼 직접 호기심에 키워 봤을 곤충에 관한 추억과, 어느새 우리 곁에서 보기 힘들어진 꿀벌의 존재감, 잊힌 고유종 식물의 특성을 활용한 동호의 작전 등이 추억을 방울방울 떠올리게 해준다.
영화는 소박한 꿈과 대안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단호한 태도와 실천이 요구됨을 감추지 않는다. 누군가는 계속 씨앗을 옮기고 전해야 한다. 마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시리즈의 원래 성격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던 것처럼, 그 대전환의 핵심 이미지였던 '씨앗'의 계승이 갖는 의의와 <비밀의 화원>이 전하고픈 결론은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통하는 대목에서 이 영화가 각 잡고 선보이려 애쓴 인상적인 몇몇 순간은 분명히 관객 중 누군가에겐 뭉클한 체험으로 남을 만하다.
<비밀의 화원>에는 아름다우면서도 아련하게 가슴을 적시는 찰나가 적지 않다. 갑자기 등장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간디학교 교가 '꿈꾸지 않으면'이 전하는 어떤 질감처럼, 이 작품이 담아낸 소중한 가치는 우리가 외면할 때 곧 생명력을 잃고 스러질 운명이다. 그 애틋함과 절박함에 관객이 공명하길 기대하며 기후위기와 공동체 붕괴의 양대 위기를 동시에 조명하는 영화의 도전이 일정하게 메아리와 만나길 기대한다.
<작품정보>
비밀의 화원
A Bee and a Silkworm
2024|한국|드라마/환경/성장
2025.07.23. 개봉|92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김성환
주연 박정학, 최나린
제작 스튜디오 하이파이브
공동제작·배급 미디어나무(주)
2024 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한국경쟁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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