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엔 일제에 부역한 적극조력자들이 있었다
[박종선 기자]
|
|
| ▲ 경학원사성이 써있는 친일파 박제봉 비석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에는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고택이 있다. 이 고택 뒷산에는 박제봉의 무덤이 있으며 그 무덤에 비석이 서 있는데 <경학원사성죽산박공제봉수장비>라고 써있다 |
| ⓒ 박종선 |
그렇다면 그 당시 부천에 친일행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친일파들만 있었을까?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공인된 친일파들도 있었지만 이외에도 일제에 적극 협력한 지역의 적극조력자들도 있었다. 직책으로 보면 박제봉과 부천군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행위로는 이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의 최말단으로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면장(面長)과 구장(區長)이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면장은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해 임명된 공적인 직책으로 직급이 낮을 뿐이지 자발적 친일없이는 임명될 수 없는 직책으로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에 관한 행위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일항쟁기 부천군은 총 15개면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소사면(1941년 소사읍으로 개칭)과 오정면이 현재의 부천시에 해당되므로 소사면장과 소사읍장을 했던 원영상의 친일행적을 통해 적극조력자들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 소사면장(소사읍장)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소사면에는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총5명의 면장이 있었다. 유대현은 1919년부터 1923년까지 5년간 면장을하였으며, 유희진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4년을 면장하였다. 박성엽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4년간을, 원영상은 1932년부터 1939년까지 8년간을 그리고 원촌임은 1940년부터 1941년까지 2년간 면장하였다.
여기에서 원영상과 원촌임(元村稔)은 같은 사람으로 원영상이 1940년 원촌임으로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원영상은 관보상 1932년으로 나오지만 그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1931년 인수인계를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원영상은 1931년 이후 소사면장과 소사읍장을 한 인물이었다.
원영상의 행적
|
|
| ▲ 1942년 8월 5일 경성일보 기사 소사읍장 원촌임(창씨개명전 원영상)을 노련한 행정관으로 소개하고 있다 |
| ⓒ 박종선 |
원영상은 면장에 머무르지 않았다. 소사면장을 하면서 1933년 소사금융조합장에 도전한 것이었다. 옆동네 소래면장이었던 이도영과 소사금융조합장을 두고 경쟁을 하였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선거결과 17표로 동률이 되었으며, 나이에서 앞선 이도영이 승리하였다. 이듬해 이도영이 도중에 사임함에 따라 원영상은 그해 9월 다시 도전하여 소사금융조합장에 오르게 되었다.
일제는 금융조합을 통해 우리나라의 자본을 흡수하였는데, 1907년 전국에 10개에 불과했던 금융조합이 1940년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940개에 이르렀다. 금융조합은 예금과 대출을 통해 관제협동조합의 역할을 하여 경제적 이득을 많이 취했는데, 일제는 조합장과 임원에 지역 유지들이 들어갈 수 있게하였다. 금융조합장과 임원이 되었다는 것은 지역의 유력한 유지가 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원영상은 부천의 대지주였다
원영상은 1938년 이미 9만평 이상의 농지를 가진 대지주였다. 경기도농회(京畿道農會)는 1938년 도 내 전답 30町步(정보,9만평) 이상 소유 지주를 파악하였는데 여기에서 원영상은 벌응절리의 박제환, 여월리의 원정희, 심곡본동의 유일한, 심곡리 최병희, 삼정리 수진광소, 오정리 수진의소, 삼정리 수진행소, 심곡리 신부정웅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면장으로서의 행위
부천군수는 면장회의를 주관하였으며, 면장은 구장회의를 주관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행정지시사항이 면장을 통해 구장과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다. 일제는 1930년대 침략전쟁을 일으키며 부족해진 인적.물적 자원을 우리나라에서 보충하였으며, 동시에 전쟁의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각종 단체를 조직하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와는 다른 친일행위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공출한 것과 방공본부와 소사오정 방공단 등과 같은 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
|
| ▲ 1942년 5월 15일 매일신보 기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기 위해 소사읍에서 대대적으로 금속류를 회수하는데 금속품은 진유가 대부분으로 1,995천(? 킬로그램 천)을 회수하였으며, 각 관공서와 회사 공장에서 회수한 것이 만여천나 된다고 소개하고있다 |
| ⓒ 박종선 |
|
|
| ▲ 1944년 7월 15일 매일신보 기사 부천군 소사읍에서는 결전하 식량확보에 매진하고저 모도무라(元村)읍장이 진두에서서 읍직원들과 주민들을 독려하여 보리공출에 총력하여 수량을 완수하였다는 기사이다. |
| ⓒ 박종선 |
【소사】부천군 소사읍에서는 결전하 식량확보에 매진하고저 모도무라(元村)읍장이 진두에서서 오하라(大原) 권업계 주임과 읍직원들을 독려하야 부락민들이 보리공출에 총력을 들여 공출수량을 완수하였다. (1944년 7월 15일 매일신보)
일제는 공습으로 인한 비상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방공본부를 설치한다. 부천 소사에서는 1938년 6월 27일 오후2시 소사공회당에서 <소사면방공본부>를 결성하였다. 면장이었던 원영상은 개회사를 하였으며, 순사주재소 수석이었던 좌등씨가 방공계획안을 참가자들에게 설명하였다. 신부정웅이 본부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부부장은 유정전차랑(柳井傳次郞)과 원인상이 선출되었다. 1938년 10월29일 오후3시 소사소학교 강당에서 이뢰인천경찰서장, 장부천군수 이하 단원 100여명이 모여 황거소배와 국가를 합창한 후 소사면과 오정면 양면을 통합하여 방공단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원영상은 간사로 선임되었다.
이처럼 소사면장(소사읍장) 원영상은 1931년 이후 소사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지역의 유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사(素砂) 그 자체가 원영상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부천에는 지금 친일파들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극조력자들 또한 연구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다. 원영상이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나라와 민족에 위기가 닥쳤을 때 친일파들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한다. 보다 많은 연구를 통해 지역의 적극조력자를 밝히고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법정형은 사형, 판례는 전무...윤석열과 불법전투개시죄
- 한화 응원석의 배꼽 잡는 대화... "여기가 꼭대기인가유?"
- [단독] 안보실 재촉 후 장관이 'VIP 직보', 2024년 1월부터 무인기 침투 준비했나
- 내란 동조 혐의 받는데... "한덕수·최상목 미국 특사로 보내자"는 <조선>
- 이 대통령 "12.3이후 한국이 세계 두 번 놀라게 했다"
- 국힘 수사, '정치 보복' 아닌 '정의 회복'이다
- 유기 농사꾼이 제초제 없이 풀 매는 법
- 세월호 진상규명 약속한 대통령님, 이것부터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이 대통령 국정지지율 64.6%... TK·보수 '잘하고 있다' 응답 상승
- 우상호 정무수석 "인사청문회 후 국민 여론 종합 검토 계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