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맥주 창고서 보낸 하룻밤... 가슴이 콩닥거렸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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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힐링이 된 태평양조 양조장 캠핑 |
| ⓒ 윤한샘 |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아내가 베란다 창고에 있다고 타박하듯 알려준다. 사놓고 두어 번밖에 쓰지 않았던 텐트를 10년 만에 꺼냈다. 오래전, 나 또한 캠핑 광풍에 휩쓸려 잔뜩 용품을 샀던 대한민국 아빠 중 하나였다.
캠핑족이 되겠다는 그럴듯한 계획도 잠시, 항상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캠핑을 몇 번 가보지도 못하고 텐트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텐트를 남겨둔 이유는 단순했다. 개중에 가장 비싼 제품이었다.
텐트 상태를 확인하려고 지퍼에 힘을 주니, 이게 웬일, 그만 부러져 버렸다. 얼마나 안 꺼냈으면 금속 지퍼가 삭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 캠핑이 고맙다.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텐트가 창고 안에서 계속 숙면을 취할 뻔했다.
올해 초 지인들과 맥주를 마시다 양조장으로 캠핑을 가보자는 제안을 던졌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맥주 캠핑. 깔깔대며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가 진지하게 논의됐고, 장마에도 아랑곳없이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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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고에 있는 배럴들. |
| ⓒ 윤한샘 |
장마가 한창인 6월 말에 날짜를 잡았지만 폭우가 내리지 않는 한,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창고에서 잠을 잘 테니 그늘막과 이불만 있어도 괜찮은 환경이었다. 혹 있을 법한 뱀이나 모기 정도만 막으면 됐다. 만약 캠핑 전문가께서 그게 무슨 캠핑이냐고 물으신다면, '차박도 캠핑인 시대에'라고 대답해 드리리라.
아무리 걱정이 없다지만 떠나기 며칠 전부터 날씨가 계속 신경 쓰였다. 예보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비가 온다고 했다가 구름, 구름이었다가 비가 온다고 날씨 애플리케이션이 변덕을 부렸지만 태풍만 불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판단 아래 출발 준비를 마쳤다. 지인들과 과일, 간식을 나누고 차가 있는 사람들은 카풀 장소를 정했다.
6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서울은 잔뜩 찌푸렸지만, 비가 오지는 않았다. 서울보다 문경의 날씨가 중요했는데, 웬걸, 내려가면 갈수록 하늘이 파래지고 해가 짱짱해지는 게 아닌가. 3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태평양조는 혹시 추울까 봐 준비한 두꺼운 옷이 후회될 정도로 구름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태평양조는 겉모습만 보면 평범한 창고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부는 맥주를 양조하는 장비들과 발효조들이 빼곡해 전문 양조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새로 들인 증류기들이 사이사이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어 장관이었다.
우리의 캠핑 장소는 양조장 건물 위에 있는 창고였다. 텐트와 용품들을 들고 올라가려는데, 지게차가 다가왔다. 오호라, 여기 맥주 공장이었지. 모든 용품들을 실은 지게차 뒤로 걷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창고 안쪽에는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 배럴과 차곡차곡 쌓여 있는 맥아들 사이에 놓인 알록달록한 텐트들이 자못 이색적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땡볕에서 땀을 흘린 우리에게 양 대표가 잠시 냉장창고에 있는 맥주 구경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모두 만세를 외치며 들어간 거대한 냉장창고에는 출고를 기다리는 많은 맥주들이 잠자고 있었다. 땀을 식히며 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맥주 마니아들의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맥주 위에 뜬 별
오후 4시, 텐트도 다 쳤고, 짐도 정리했으니, 본격적으로 먹을 시간이다. 창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비큐 장비에는 이미 숯이 올려져 있었다. 불을 붙이던 양 대표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말을 꺼냈다. 얼마나 많이 만드셨는지 내년 캠핑에도 아마 볼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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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대로 구워진 삼겹살 |
| ⓒ 윤한샘 |
20분 정도 지났을까, 거짓말 보태지 않고, 진정한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삼겹살 구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두께였지만 핏기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구석구석 육즙이 꽉 차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주말농장에서 직접 따 가지고 온 상추와 고추는 흑백요리사에서도 볼 수 없는 맛깔난 궁합을 이루었다. 평상시에 삼겹살을 즐겨하지 않는 나였지만 부끄러울 정도로 허겁지겁 고기를 입에 넣었다. 목이 메면 뒤에 있는 생맥주 기계에서 맥주를 따르면 그만.
진수성찬 속에 사는 이야기가 오갔다. 늦둥이가 자라는 이야기, 고달픈 직장 이야기, 그동안 다녀온 여행 이야기 등, 맥주 캠핑이었지만 정작 맥주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맥주는 그냥 매개체일 뿐이었다, 초면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어색함 따위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맥주는 사실 별게 아니다. 서로의 삶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소통하는 도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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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벨이 없는 맥주들. 캠핑의 주인공이다. |
| ⓒ 윤한샘 |
자연발효를 추구하는 태평양조에는 재미있고 실험적인 맥주들로 가득했다. 예를 들어, 와일드 가든 방아는 야생에 있는 미생물로 발효시킨 맥주에 경북 특산물 방아잎을 넣은 맥주다. 서울 사람인 나는 방아잎이 생소했다. 마치 진한 솔 향이 스며든 깻잎 같은 느낌이랄까. 산미 가득한 맥주에 방아 향은 신기하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차례주로 올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맥주들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마시라. 취한 게 아니라, 라벨이 없어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니. 확실한 건, 자연발효에서 오는 독특한 향과 산미, 그 주위를 채우고 있는 과일 같은 부가물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신맛을 꺼리는 나도 맛있게 한두 잔을 비울 수 있었으니, 말해 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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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닥불은 캠핑의 필수 |
| ⓒ 윤한샘 |
요즘은 가끔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보다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맥주라는 도구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그러면서 감정과 스트레스를 푸는 경험이 빡빡한 사회생활을 버틸 수 있는 작은 힘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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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은 안동 중앙시장에서 가져온 해장국. 전국 최고라 할 수 있다. |
| ⓒ 윤한샘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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