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만 해도 고시생이었던 그가 정국의 핵으로 등장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7. 1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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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중종의 선택, 조광조 통해 이룬 사림파 집권

[김종성 기자]

 1750년에 그려진 조광조 영정
ⓒ 위키미디어 공용
조선 중기 개혁가인 정암 조광조는 고려시대 개혁가인 신돈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 신돈은 승려이고 조광조는 선비였지만, 두 사람의 역사적 역할은 흡사했다. 1365년에 역사무대로 뛰어오른 신돈과 1516년에 그 무대를 장악한 조광조는 151년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거의 비슷한 과제를 수행했다.

신돈은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받은 뒤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중앙 무대에 안착시켰다. 신진사대부는 지방에 거점을 두고 중소 규모 토지를 보유한 유교적 교양인들이었다. 최상층 부자가 아닌 이 세력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고 중앙 진출을 도모하는 현상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이 상황에서 권문세족 숙청에 앞장선 인물이 신돈이다.

조광조는 중종 임금으로부터 전권을 받아 개혁세력인 사림파의 집권을 성사시킨 뒤 기득권층인 훈구파를 약화시켰다. 사림파는 신진사대부의 후예였으니, 신돈이 했던 일을 조광조가 뒤이은 셈이다.

두 사람은 역사무대에 올랐다가 퇴장하는 모습도 비슷했다. 군주가 신진 인물을 전격 발탁해 전권을 맡긴 뒤 군주 자신은 뒤로 물러서고, 신진 인물이 군주의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구세력을 숙청하는 양상이 전개됐다. 그 신진의 권력이 왕권을 위협하기 직전에 의문의 역모사건이 발생해 신진이 처형되는 비극이 똑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신돈이 등용시킨 세력은 불교 승려들이 아니라 유교 사대부들이다. 그런데도 선비들은 그를 '요승'으로 폄하했다. 공민왕이 그를 깎아내린 결과다.

조광조 역시 1520년에 처형될 당시 중종에 의해 폄하됐지만, 광해군 때인 1610년에 국가 공인 현자의 반열에 올랐다. 성균관 대성전 같은 공자 사당에 공자와 함께 모셔지는 문묘종사(문묘배향)로 인해 조광조는 그해에 국가적 스승의 위상을 갖게 됐다. 이는 그를 따르는 세력이 1567년에 집권한 결과다. 그래서 그는 요유(妖儒)로 불릴 일이 없게 됐다.

신돈의 지원에 힘입어 지배층이 된 신진사대부의 일부는 중앙 정계에 들어간 뒤 조선 건국에 참여했지만, 그보다 많은 또 다른 일부는 조선 건국을 비판하며 지방에서 활동했다. 그런 그들을 중앙 정계로 다시 끌어올린 인물이 조선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재위 1469~1495)이다. 성종이 그렇게 한 것은 수도권에 기반을 둔 대토지 소유자들인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에서였다.

비교적 평화롭게 이뤄진 지배층 교체

사림파라는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의 후예는 얼마 뒤 연산군 치하에서 사화(士禍)라는 시련을 겪었다.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 등은 신진세력을 견제하고 길들이려는 연산군의 의도가 투영된 사건들이다.

선비들의 화(禍)로 불리는 그 같은 시련을 겪은 사림파가 영구적으로 집권한 것은 선조가 즉위한 1567년이다. 이때부터 1910년 조선 멸망 때까지 사림파와 그 후예들이 왕조를 이끌어나갔다.

그런데 1567년 이전에 사림파가 잠시 집권한 기간이 있다. 조광조가 국정을 주도한 1516년부터 1519년까지다. 탄압을 받던 개혁세력의 집권이 이때 성사됐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 과정에서 유혈투쟁이 수반되기 쉬웠다. 그러나 이때는 그런 불상사가 없었다. 비교적 평화롭게 지배층 교체가 이뤄졌다.

1506년에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주역들의 추대를 받은 중종은 그 뒤 오랫동안 그들의 허수아비로 살았다. 그런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 그의 강제이혼이다. 중종의 조강지처인 신씨가 연산군의 처조카라는 이유로 훈구파인 반정 주역들이 중종에게 이혼을 요구한 결과다.

그런 상징적 상태를 뒤엎고 훈구파를 약화시키기 위한 사림파의 도전이 1515년에 본격화됐다. 신씨가 쫓겨난 뒤 중전이 된 장경왕후가 그해 3월 16일(음력 3.2)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은 신씨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신씨와 중종의 재결합을 촉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림파는 이를 호기로 파악했다. 신씨가 복귀해 왕비가 되는 것은 훈구파 반정 주역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훈구파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신씨를 복귀시키는 것은 중종반정을 부정하는 일이므로 중종이 그런 모험을 할 리 없다는 정서가 그들을 지배했다. 이들은 공연히 일을 만들어 이슈를 부각시키기보다는 정국 추이를 지켜보는 쪽을 선택했다.

신씨가 정말로 복귀하면 훈구파들이 단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훈구파는 여유를 갖고 상황을 관망했다. 장경왕후 사망 당시만 해도 과거시험 수험생이었던 조광조는 바로 이 상황을 활용해 몇 달 뒤 집권에 성공했다. 집권세력이 이 문제에 적극 대처하기 힘든 일종의 공백 상태를 포착한 결과다.

신씨를 복귀시키라는 여론이 거세지는 속에서, 그해 9월 15일(음력 8.8)에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신씨 복권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훈구파 진영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임금의 잘잘못을 간쟁하는 대사간 이행이 사흘 뒤 두 사람을 탄핵한 일이다. 신씨 문제를 확대시키면 안 된다는 훈구파 진영의 묵시적 합의가 사간원 기관장인 이행에 의해 훼손된 것이다. 이행의 탄핵으로 인해 두 사람은 10월 1일(음 8.24) 귀양을 가게 됐다. 이는 신씨 문제를 더욱 확산시켰다.

중종이 희망한 것은 정치세력 균형과 왕권강화

이런 상황에서 그해 9월 29일(음 8.22), 조광조가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했다. 이 합격은 조광조의 파란만장한 청년 시절을 감안하면 상당히 뜻밖의 일이었다.

운동권 선비인 그는 25세 때인 1507년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가 의금부에 체포됐다.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인 데다가 명문가의 일원이라는 요인 등에 힘입어 훈방된 그는 그 뒤 성균관 유생이 되어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랬던 그가 역모죄 연루 8년 만에 서른세 살 나이로 과거급제를 이뤘던 것이다. 조선왕조 오백 년의 합격자 평균 연령이 36.7세인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나이에 급제한 셈이다.

그런데 이 급제생은 일반적인 급제자들과 달랐다. 관료 생활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그 시기에 그는 정국 이슈에 곧바로 뛰어들었다. 이 신진 관료는 대사간 이행의 패착을 활용해 핫이슈의 중심부로 난입했다.

과거급제 3개월이 조금 안 된 그해 12월 24일(음 11.20), 그는 하필이면 이행이 근무하는 사간원의 정6품 정언(正言)에 임명됐다. 신입인 그는 이때부터 박상·김정에 대한 조치를 변경해야 한다며 사간원 내에서 '바른말'을 시작했다. 상관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틀 뒤 초대형 사고가 터졌다. 3일 차인 그가 사간원의 문제점에 관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벌어졌다.

음력으로 중종 10년 11월 22일 자(양력 1515.12.26.) <중종실록>에 실린 문제의 상소문에 따르면, 조광조는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며 박상·김정의 상소에 대한 사간원의 대응을 비판했다. 상소 내용이 지나치면 기각하면 될 것을, 처벌을 주청한 대사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뒤 기상천외한 요구 사항을 상소문에 담았다. 사간원 관료들을 전부 파면해달라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중종의 반응이다. 처음에는 조광조를 만류했던 그는 조광조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확인한 뒤 의정부에 의견을 물어봤다. 의정부는 조광조의 말이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중종은 조광조를 제외한 사간원 관료들을 전원 경질했다. 조광조의 상소보다 훨씬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사건은 몇 달 전만 해도 고시생이었던 조광조를 정국의 핵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조정이 재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1516년 초에 사상 초유의 사림파 정권이 출범했다. 훈구파가 적극 대처하기 힘든 상황을 활용한, 극적이면서 싱거운 지배층 교체였다. 일반적인 여야 정권교체가 아니라 지배층 교체의 성격을 띠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이 일어났던 것이다. 패기 있고 무모한 젊은 신진 관료를 앞세워 구세력을 제압하려는 중종의 의중이 반영된 사건이었다.

조광조의 상소는 신씨 복귀를 지지하는 기조를 깔고 있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인사개편 요구는 받아들이면서도 신씨 복귀를 추진하지는 않았다. 조광조도 그것을 굳이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다. 조광조와 중종 모두 훈구파 공격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은 조광조는 광풍 같은 개혁조치들을 쏟아내며 훈구파를 상당부분 약화시켰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후세 선비들의 신화적 존재가 됐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훈구파의 완전 몰락은 중종이 원치 않는 바였다. 중종이 희망한 것은 정치세력 균형과 왕권강화였다. 1520년에 중종은 조광조를 역적으로 몰며 사약을 보낸 뒤 약화된 훈구파를 이끌고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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