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미국주식에 올인? 이들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김상목 기자]
고대 그리스에 헤시오도스란 작가가 있었다. 다른 이들이 왕과 영웅들의 무용담을 노래하던 시절, 그는 소박한 삶과 노동의 가치를 교훈적인 내용으로 전했고, 그 결과 최초의 서민 문학이라 할 만한 업적을 후대에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오늘날 그리스 신화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마련인 <신통기(신들의 계보)>와 함께 작가의 철학이 집대성된 교훈시 <일과 날>이 전한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판본에선 거의 대부분 앞의 두 편이 한데 묶여 있는데, 처음엔 누구나 전반부에 배치된 <신통기>만 읽고 <일과 날>은 잘 보지 않는다. 중구난방이던 그리스 신화의 계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작을 보느라 평범한 서민의 삶을 예찬한 뒤의 내용은 통 눈에 들어오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그렇게 현실에 존재함에도 모두가 외면하던 소박한 일상을 포착했기에, 작가는 불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일과 날>은 바로 그런 헤시오도스의 위업을 21세기 한국에서 재현하려는 시도다. 영화는 고대 그리스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듣기만 해도 끌리는 빛나는 존재를 보여주지 않는다. 평범한 이들의 삶과는 하늘과 땅 차이, 마치 올림포스 산 위에서 유희하듯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고대 신들의 기행을 전시하는 건 차고 넘친다는 듯, 카메라는 그 대척점에 존재하는 이들을 조명한다. 그 여정에 함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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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과 날> 스틸 |
| ⓒ 스튜디오 에이드 |
9명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들의 '일과 삶'을 묵묵히 조명하는 카메라 화면 속에서 종종 그들의 입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살아가는 이야기, 지금 하는 고민이 툭 튀어나왔다 사라지곤 한다. 극적인 분위기 고조나 구구절절 설명이 따로 붙지 않기에 관객은 눈과 귀를 쫑긋 세우고 오히려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응시하고 있으면 서서히 뭔가가 짚이고 보이기 시작한다. 그 단계에 진입했다면 관객은 감독이 기대한 궤도에 탈 없이 안착한 셈이다.
어떤 기준과 경로로 섭외했을까 저절로 궁금해지는 9명은 나이도 경력도 각기 동떨어져 있다. 너무 공통점이 없기에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의 침묵하는 다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들을 상징하는 기운이 조성된다. 어떤 이들이 등장하기에 그럴까?
<일과 삶>은 의도적으로 사건을 부각하고 기승전결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정말 일상 밀착 카메라처럼 9명 개별의 일상을 화면에 복원 또는 재현하는 데 오로지 집중한다. 선택이 명확한 태도다. 그런 의도에 충실히 부합하고자 전개 역시 그들의 하루를 오롯이 관객에게 전하는 데 맞춰진다. 물론 실제 일상의 시간을 영화라는 매체 특성상 축약하고 편집할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 현실의 그것과 닮은 꼴로 그리려 한다. 그 해답은 하루의 시작과 끝의 무한 반복이다. 실제 일상이 그러하니까.
그게 대체 온라인에 홍수를 이룬 브이로그 영상과 뭐가 다른지 의아할 테다. 얼핏 외형만 보면 사실 딱히 다를 것도 없다. 하지만 보이는 현상적인 이미지는 유사할지 몰라도, 접근 방식과 태도는 딴판, 아니 대척점에 가깝다. 브이로그가 자신, 특히 타인에게 보여주고픈 단면을 부각하는 데 맞춰진다면, <일과 날> 속 인물들은 뭐 이런 걸 찍냐고 반문할 듯한 일상, 그들이 수천 일을 반복해온 대수로울 게 없는 모습으로 공개된다. '먹방'을 찍는다고 치면, 매일 먹는 가정식과 기발한 퓨전 레시피 과시의 차이인 셈이다. '태도'의 차이는 이 영화의 결정적 개성이자 특징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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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과 날> 스틸 |
| ⓒ 스튜디오 에이드 |
이번엔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가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다. 중년 여성이 수북히 쌓인 채 앞을 지나치는 더미 속에서 재활용 플라스틱을 분리한다. 그는 종일 반복되는 노동을 묵묵히 행한다. 누군가 문을 열고 불을 켜며 일과를 준비한다. 점점 사라지는 백반집 사장님이다. 사장이라지만 그 외에는 다른 일손은 보이지 않는다. 수십 개가 넘는 반찬을 손수 만드는 침묵의 노동을 그는 묵묵히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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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과 날> 스틸 |
| ⓒ 스튜디오 에이드 |
그들의 다양한 노동과 일상은 마치 1주일이 흘러가듯 어슴프레한 새벽 기상에서 출발해 고단한 몸을 누이는 잠자리 암전으로 마무리된다. 태초에 신이 천지창조하듯 그 과정은 엿새 동안 반복된다. 7번째 날은 안식일이니 당연히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냥 대충 찍는 것 같아도 제작진의 설정과 기획은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9명의 삶은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그들이 임하는 노동은 적재적소로 안배된다. 이제는 경쟁에서 도태된 것으로 치부하는 업종, 사람들의 시선에 도무지 잡히지 않는 변방, 개별 작업 형태라 막상 업계 관계자가 아니면 파악하기 힘든 분야, 그리고 흔히 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임금 노동'에서 비켜난 사회적 노동에 관해 조명한다. 그렇다고 배제된 노동을 비분강개하며 폭로하고 고발하진 않는다. 그저 응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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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과 날> 스틸 |
| ⓒ 스튜디오 에이드 |
하지만 그들의 일과 삶은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들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노동을 견디고 고립을 면하고자 배경음처럼 재생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동영상 속에선 계속 세상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경고한다. 종말론의 풍경이 따로 없다. 10년 후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수억 개 사라진다고 한다. 20년 후에는 저출산 때문에 현재의 사회 구조가 붕괴될 거란다. 30년 후에는 기후변화가 파괴적 영향을 불러오리라 전망한다. 9명 각각의 표정엔 그늘이 서리고, 짧은 인터뷰에선 자신과 사회의 전망에 관한 염려가 예언처럼 전해진다. 평생 직장은 소멸했고 자기 분야에 인생을 바치는 숙련된 장인의 자긍심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노동의 황혼이 도래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고민은 과연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될까? 다시 헤시오도스로 돌아가면 답이 있다. 이 그리스 작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이 형의 상속할 몫을 가로채고자 거짓 증거를 만들어 형제는 기나긴 소송 분쟁을 치러야 했다. 이 넌더리나는 경험을 겪으며 헤시오도스는 투기와 사행심, 일확천금의 욕망을 경계하며 반대편에 선 노동의 가치와 소박한 일상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거창하게 늘어놓고 사람들 이목을 끌기엔 딱 좋지만, 막상 듣고 나면 공허한 몽상에 불과한 신과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훈이 깃든 서정적인 글에 천착한 데엔 현실의 삶이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누구나 땀 흘려 묵묵히 일하는 삶을 우습게 여기는 21세기 한국이다. 비트코인이다 미국주식이다 역시 부동산 불패로다 하며 투기를 부추기고 비밀 정보에 목을 매는 세태가 굳어진 지 오래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찌들어 자신이 잘못 살고 있는지 반문하고 만다. 뭐가 한참 뒤틀려도 단단히 잘못되는 셈이다. 모두가 자신만 뒤처지고 불행하다고 자학하게 만든다. 자신이 아둔해서 놓치는 부와 성공의 비밀을 남들은 잽싸게 움켜쥐고 인스타그램에서 엿보이듯 삶을 즐기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렇게 배금주의와 대박 한탕을 부추기는 21세기 신자유주의가 황폐하게 만든 세상에서, 하지만 여전히 세계를 지탱하는 건 존재해도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이웃들의 일상과 노동이란 진실을 이 영화는 은은히 조명하며 관객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너무 가냘픈 속삭임이라 과연 누가 귀를 기울일까 싶지만, 우연히 <일과 날>에 접속하게 된다면 영화 속 9명의 이웃과 자신을 겹쳐 보며 당연한 듯 혼을 쏙 빼놓는 지금 세상의 광풍에서 벗어나 '리얼 월드'를 응시할 만하다.
<작품정보>
일과 날
Works and Days
2024|한국|다큐멘터리
2025.07.16. 개봉|84분|전체관람가
감 박민수, 안건형
출연 박인수, 이승진 등
제작 비우무비
배급 스튜디오 에이드
2024 29회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비프메세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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