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는 고요한 마을인 줄 알았는데... 그 순간 찾아온 반전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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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 |
|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
한적한 산골 마을, 도시에서 제빵사로 일하던 '제레미'가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도착한다. 과거에 신세를 지며 일했던 동네 빵집 주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돌아온 것. 혼자가 된 '마르틴'과 재회해 고인의 명복을 기린 그는 고인의 아들이자 어릴 적 친구인 '뱅상'과 만난다. 하지만 옛 친구는 그를 경계하며 서먹하게 대한다.
오랜만에 귀향한 동네가 마음에 드는지 제레미는 며칠 더 머물기로 한다. 숙박 시설이 딱히 없는 작은 마을이라 그는 마르틴의 집에서 숙박하며 산책과 버섯 채집으로 소일한다. 또래 친구 '왈테르'의 집에도 방문하지만, 반기는 눈치는 아니다. 지역 사회 중심인 성당의 나이든 신부와 종종 버섯을 따다 마주치곤 하는 정도가 이곳에서 대인관계의 거의 전부다.
마르틴은 다시 이곳에 정착해 빵집을 물려받으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제안하지만, 뱅상은 모종의 의심을 품고 노골적으로 제레미가 얼른 떠나기를 강요한다. 옛 친구의 억측과 시비에 무신경하게 대응하지만,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뜻밖의 실종 사건이 터진다. 이제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친밀함 뒤에 불신과 의구심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제레미는 계속 마을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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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 |
|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체된 작은 마을 풍경은 자연스레 단순히 평화로운 시골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적은 드물고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훤하게 꿸 정도로 서로의 사정을 잘 아는 주민들 사이에서 이방인의 동태는 마치 실시간 감시되듯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누구나 많은 걸 알지만, 딱히 티를 내진 않는다. 그러나 언제든 그런 관망은 뒤집힐 수 있기에, 영화 내내 마을의 공기마저 축 처지듯 중압감으로 작용한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보여 안도하면 어딘가 구석에서 몰래 지켜보는 눈동자나 흔들리는 풀더미가 스친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사실 영화 내내 '사건'이라 붙일 만큼 파격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장례식을 치르고, 이웃을 방문하고, 산기슭에서 버섯을 딴다.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경찰이 수사를 개시해 실종 당시 정황을 캐지만,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듯 묘사될 따름이다. 그렇게 정적인 상황의 연속인데도 묘한 긴장감은 새벽 짙은 안개처럼 가실 기미가 없다.
감독은 고전 추리 문학의 왕도에 충실하다. 탐정의 단서 확보와 추리 과정을 독자에게 감추지 않고 공유하듯, 영화 속 개별 인물들이 전부 알지 못하는 파편적인 단서도 지켜보는 관객에겐 거의 전적으로 개방된다. '알고 보니 이러이러한 비밀이 감춰져 있더라' 식의 설정은 거의 구사되지 않는다. 사건의 실마리가 될 법한 과거사, 주인공이 마을에 살던 시절 벌어진 은밀한 사건이 배후로 활용되지도 않는다. 관객은 대충 옛날에 저들 사이는 대충 이렇겠지 상상할 수 있지만, 영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지나칠 따름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훤히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관객은 갈등 해소 이후 결말을 기대하겠지만, 감독은 정석적인 문학적 전개를 구사하면서도, 통속적인 전개를 채용하지는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툭 던지듯 등장하는 새로운 단서마다 관객이 예상하던 진상이 뒤집히고, 인물들의 속내는 모호해진다. 그야말로 '한 길 사람 속'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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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 |
|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앙숙이 있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듯 각자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고, 종잡을 수 없는 변칙적 방법으로 상대방의 의표를 찌른다. 그들 사이의 갈등은 대충 이 정도겠지 하고 짐작하던 관객의 허도 찌르며 의외의 사태로 치닫는다. 그러나 다툼의 원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저 과대망상 혹은 집착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 내내 결정적 분기점마다 사실관계는 아주 작은 균열의 제시로 삽시간에 뒤집히며 관객을 혼란으로 내몬다. 그 솜씨가 절륜해 작위적이라는 불만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알랭 기로디 감독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호수의 이방인>(2013)에서 성 소수자의 만남 장소로 쓰이는 한적한 호숫가에서 버려지는 의문의 사건을 긴장감 넘치는 퀴어-스릴러로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미세리코르디아>는 성공적인 전작의 답습에 그치지 않고 좀 더 확장된 변형에 도전한다. 미스터리 스릴러 구성도 살짝 비틀지만, 감독의 전작들을 봐온 익숙한 관객에게도 허를 찌르는 수 싸움인 셈이다. 소재에 이야기가 잠식되기는커녕, 자유자재 활용으로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이 과정에서 창출된다.
그러나 영화는 깜짝 반전으로 관객을 농락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제목이 왜 '미세리코르디아(Misericordia, 자비)'인지 감독은 차근차근 관객에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충동적으로 사회규범상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범인을 잡기 위한 그물이 점점 포위망을 좁히는 가운데, 심리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의 초조함과 함께, '죄'에 관한 윤리적 고민이 병행된다.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노신부는 범인이 누군지 훤히 알고 있다.
어쩌면 그 말고도 진실을 아는 이가 여럿, 어쩌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인을 응징한다고 해서 문제가 원상회복되진 못한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충동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른 자에게 징벌 혹은 갱생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영화는 신부의 입을 통해 우리의 통념에 도전하며 그 이질감을 중요한 화두이자 긴장의 핵심으로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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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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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과거의 원한 같은 게 딱히 언급되지 않는 영화의 기조는, 충격적인 사건이 감정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범행의 대가는 어떤 식으로 속죄해야 할까? 이야기는 정답을 제시해 관객에게 판결문을 통지하는 대신, 관객 각자에게 판결봉의 묵직함을 체감하게 만든다.
독립예술영화 관객은 흔히 작가주의 감독에 대해 과도한 형식화와 스타일 위주로 접근하곤 한다. 즉 알랭 기로디의 신작을 보는 순간, 감독의 기존 스타일과 비교 분석하고, 장면의 의도와 형식 실험을 조사하는 식이다. 당연히 감독이 교류하거나 영향받은 다른 거장이나 고전과의 비교도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알랭 기로디는 그런 '레퍼런스'나 '오마주'를 의식하는 기색은 통 없다. 대신에 감독은 고전 그리스 비극에서 제시하곤 하던, 신이 의도한 숙명과 그에 맞서는 인간, 아무리 온갖 꾀를 내고 노력해도 헛되게 운명에 휘말리는 패배, 우연처럼 툭 삐져나오는 소소한 필연의 결과를 재연하고자 한다. 보는 눈 없는 낙엽 무성한 숲속에서 감춰둔 속내가 폭발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완벽하게 은폐했다고 믿지만 정작 주변 누구나 다 짐작하는 사건의 진실과 침묵 대신에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들, 행운 또는 저주로 각자 기능하는 비밀스러운 불씨들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는 융단처럼 솜씨 좋게 하나의 이야기로 합류한다.
과연 관객에게 공유된 영화 속 시간 이후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릴까?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과거 추억 속 '고향'에서 제레미는 정착하게 될까? 그렇다면 그건 주인공의 능동적 선택인지 일종의 연금 혹은 유배에 해당하는 것인지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 될 테다. 충동으로 벌어진 사건은 소수 반사회적 범죄자의 일탈이 아니라 우리 누구나 당사자/대상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언뜻 차가운 현미경 같은 관찰과 동시에 낯선 형태의 연민과 애정이 자아내는 파격적 변주가 조화를 이루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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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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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éricorde
2024|프랑스|블랙 코미디, 범죄, 드라마, 스릴러
2025.07.16. 개봉|104분|청소년 관람불가
감독/각본 알랭 기로디
출연 펠릭스 키실, 카트린 프로, 장 밥티스트 뒤랑, 세르주 리샤르, 자크 드블레, 다비드 아얄라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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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세리코르디아>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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