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222번 아이는 숫자가 아닌 생명이었다
[안치용 기자]
| ▲ '오징어 게임' 시즌3은 왜 222인가 오징어 게임 시즌3가 2025년 6월 27일 넷플릭스에 공개되며,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했다. 시즌3을 두고 상반된 반응이 이어졌지만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흥행은 성공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시즌3은 222 아이에 해석이 집약된다. 222라는 숫자는 게임 중에 상속/계승이 이루어졌고 상속자가 스스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참가자의 개체 식별 번호로도 독특하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세계의 의미망과 희망의 상징을 담아낸다. 기독교적 해석과도 연결되기에 조금 힘을 주어 강조하면 구원의 서사라는 해석까지 가능해진다. #오진어게임3 #황동혁 #이정재 #오징어게임 #오진어게임3해석 ⓒ 안치용의 시네마 인문학 |
*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3가 2025년 6월 27일 넷플릭스에 공개되며,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했다. 시즌3을 두고 상반된 반응이 이어졌지만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흥행은 성공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시즌3은 '222 아이'에 해석이 집약된다.
222라는 숫자는 게임 중에 상속과 계승이 이루어졌고 상속자가 스스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참가자의 개체 식별 번호로도 독특하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세계의 의미망과 희망의 상징을 담아낸다. 기독교적 해석과도 연결되기에 조금 힘을 주어 강조하면 구원의 서사라는 해석까지 가능해진다.
222
<오징어 게임> 시리즈 내내 참가자는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린다. 훈련소나 감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박탈하는 일반적 수단이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는 게임을 존속하는 부품이나 물화한 수치로 전락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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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징어게임'3 스틸사진 |
| ⓒ 넷플릭스 |
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상실과 함께 숫자 222번이 된 아이는 작품에서 언급되듯 이론의 여지 없는 무능력자이지만, 가장 강력한 생명의 힘으로 시스템에 저항한다. 게임의 규칙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탄생하고, 여러 인물의 돌봄과 보호를 통해 양육되며, 말 그대로의 희생으로 원하지도 않은 승리자가 되는 결말까지, 게임을 완벽하게 전복한다. 이 시스템이 예상하지 못한, 절대 불가능한 우승자를 낸 게 연출자 의도의 핵심이다.
게임이든 자본주의든 시스템은 인간을 수치화하지만 인간 개인 안에 내재한 생명의 가치와 존엄은 시스템의 흉계에도 불구하고 숫자로 환원되기를 거절한다는 전언이다.
시스템 안에서 태어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아이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피투성을 온전히 구현한다. 동시에 삶과 공존을 긍정하는 실존주의 유파에서 말하는 연대와 참여를 통해 피투성을 뚫고 생명으로, 인간으로 우뚝 설 기회를 거머쥔다는 점에서 명확히 실존적이다.
모든 인간을 익명화하고, 그들의 죽음마저 숫자로 처리하는 오징어 게임에서 무명이어서 오히려 익명화가 불가능한 222번 아이는 숫자로 된 체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훈의 선언은 이 아이를 통해 증명된다. 222번 아이를 중심으로 한 시즌3은,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사회비판을 넘어,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작품의 방향을 정했다.
2라는 숫자의 상징성
그러므로 222라는 숫자 부여가 단순히 우연일 수는 없다. 이 숫자는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담아내는 여러 층위 상징의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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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징어 게임》 시즌3 |
| ⓒ 넷플릭스 |
두 번째 2는 인간세계에서나 가능한 두 모성과 그들의 희생을 의미한다. 장금자(강애심)와 김준희(조유리)라는 두 늙고 젊은 어머니가 직접적으로 아이의 생존에 관여하며 강력한 모성을 발현한다. 장금자의 모성은 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희생시키는 숭고한 역설의 모성이다. 포유류의 모성이 아니라 인간의 모성을 표상한다. 그저 포유류로서 주어진 자신의 모성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인간 모성의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하며, 드러난 결과로서 모성을 저버린 자신의 행동을 죽음으로 속죄하는 모습까지, 절대적인 모성 그 자체를 제시한다.
젊은 어머니인 준희의 희생은 비교적 갈등이 적은 영역의 선택으로 주어진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모성(혹은 부성?)의 영역에서 쉽지 않지만 가능한 행동이다. 준희의 모성은 개연성 측면에서 어쩌면 장금자의 모성보다 더 공감할 수 있다. 김준희 모성은 공감, 장금자의 모성은 극적 장치로 각각 중요성을 지닌다.
세 번째 2는 모성을 인간성으로 확대한다. 이 게임에서 아이의 구원은 모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두 번의 투신은 모성과 인간성의 연결이자 합일이다. 모성을 통해서 인간성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 같기도 하다. 반대로 마지막에 아이가 456번과 222번이 찍힌 두 참가복에 쌓여 놓인 것이 상징하듯 모성은 인간성의 외피를 두른 모성으로 고양돼야 한다는 뜻 같기도 하다. 장금자가 자기 탯줄로 낳은 아들을 죽이고 탯줄을 잘라준 남의 아들을 살리는 고양된 모성을 실천하였듯이 말이다.
준희와 기훈 두 사람은 투신으로 연결된다. 투신은 저항이자 외침이고, 스스로 낮아짐을 택한 종교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기훈의 투신은, 사회가 만들어낸 탐욕이 부성이라는 인간적인 본능마저 침해하는 장면에서, 그 아이의 친아버지가 아니지만 자신 또한 아버지로서 '아버지'성, 혹은 사회 전반에 공격성을 강화하고 욕망의 호르몬으로 비인간화를 촉진한 남성성에 대한 속죄이기도 하다. 무고한 희생이라고 할 두 투신을 종교적 맥락에서 이해해도 무방하다.
각기 다른 순간에 투신한 두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위를 바라보며 죽도록 한 앵글은 연출과 극본을 맡은 황동혁 감독이, 두 인물의 죽음이 지닌 공통된 메시지나 서사적 연결성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기훈이 투신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대사 "사람은…"과도 맞닿는다. 아이가 있는 쪽으로, 또 시청자 쪽으로 시선을 향한 두 사람이 게임 참가자이지만 숭고한 죽음을 택한 무고한 인물임을 알려준다.
'6'과 기독교
222를 10진법으로 읽지 않고 단순 합산하면 6이다. '2+2+2'는 의미의 구도로 작동하는 것과 함께 극구성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222번이 살아남고 우승하며 미래를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핵심적인 6명의 조력이 있었다.
먼저 앞에서 설명하였듯 아이를 낳고 돌본 두 엄마 준희와 금자가 있다. 조현주(박성훈)와 성기훈은 아이를 보호한다. 여기까지 4명은 모두 게임 중 사망한다. 세 명은 자살, 한 명은 살해당하는데 살인자가 아이의 친부이다. 프론트맨(이병헌)과 황준호(위하준) 형제는 아이를 빼내어 키우는 에필로그 성격의 양육자로 설정된다. 이 6명의 조력으로 222번 아이는 생명으로 인간으로 살아갈 기회를 잡는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이 필요하다는 경구가 다소 애매하게 적용된 셈이다.
6명의 주요 인물이 아이의 출생, 생존,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얽히며, 여성/남성/트랜드젠더에다 게임의 자발적 참여자/파괴자/변절자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연대가 형성된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마지막 게임이 욕심과 불신에 망가지지 않고 예컨대 추첨이라든지 하는 합리적 방식에 의해 진행됐다면 마지막에 남았어야 할 인간의 숫자가 6이다. 인간 공동체의 완벽한 형태의 상징일 수도 있다.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긴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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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징어 게임》 시즌3 |
| ⓒ 넷플릭스 |
더 다양한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결정적으로 이 작품이 '6+1'의 구도를 취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6은 살펴본 대로 인간이고, 1은 아이로, 역설적 의미의 비인간이자 전형적 피투성의 존재이다. 여기서 종교나 기독교의 의미를 엿본다면 그건 시청자 마음이다. 분명히 할 것은 '6+1'이 곧 7은 아니라는 점이다. '6+1'이 7이 되려면 7이 내려와야 한다. 한데 그러려고 할까?
절충
이 작품에다 핍진성이나 개연성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건 어차피 작품 자체가 풍자이거나 은유, 알레고리, 혹은 그 비슷한 무엇이어서 타당한 방법론이 아니다. 황 감독은 시즌1을 넘어서기 위해 참신함 대신 무게 쪽을 택했고 무게에 재미를 흩뿌리려고 골머리를 앓았을 터이다.
작품의 결론이란 게 돈으로 완성되는 휴머니즘이어서 많은 비판이 가능할 법하다. 개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강렬한 반어이거나 무게를 택한 데 따른 불가피한 대중성의 가미쯤으로 받아들인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물신성과 계급성이다. 작품이 내어놓은 답은 성기훈의 마지막 말 "사람은…"에서 찾을 수 있다. 설득력 있게 들릴지 말지는 사람마다 다르겠다. 이 작품이 메시지로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작품 자체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플랫폼을 통해 상업성으로 첨예하게 경쟁했으니 너무 핍진하게 진실성을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서 언급한 222와 6 외에 게임자의 죽음의 방식과 자살자(희생) 사이의 죽음 방식의 차이, 모성의 여러 모습, 모성과 부성의 대비, 침묵하는 신 앞에서 인간 중심의 구원을 말한 '재림' 서사 등 이야깃거리가 많다. 특히 시즌 3은 크게 보아 시즌2를 포괄하기에 성기훈의 두 번째 게임 참가, 222번의 투신에 이은 두 번째 투신 등 재림(再臨)을 주요 모티프로 활용했다. 그렇다고 기독교적 재림 개념을 직접 지시했다고 할 수는 없고 재림의 원형 구도를 차용했다고 보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무난하지 싶다.
시즌1만큼 강한 인상을 주긴 어려웠을 것이기에 시즌3은 상투성을 받아들이며 디테일과 메시지의 무게로 승부수를 던졌다. 클리셰의 반복 등 분명 진부한 요소가 많긴 하다. 하지만 중독성 또한 강하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개인적으로는 시즌2와 시즌3을 묶어서 전체로 두 개 시즌으로 공개했으면 더 깔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남는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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