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으로 살아남기] 긁지 않은 복권 수백 장 쌓아놓고 "그땐 그랬지"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향인으로 살아남기'는 40대 내향인 도시 남녀가 쓰는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송유정 기자]
"진짜야? 나도 휴가 내고 한번 도전해 볼까?"
로또 명당을 찾아 전국 일주를 하며 로또 100장을 구매한 유튜버가 1등에 당첨됐다는 영상을 본 남편의 반응이었다. 물론 영상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유튜버가 아내를 놀라게 하려고 가짜 로또 어플로 몰래 카메라를 한 것이었다. 덕분에 잠시 '어쩌면 우리도?'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실제로 그런 여행을 해보면 어떨지 고민도 해보았다. 우리 부부에게 이제 여름휴가 여행은 영 낯선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50세 전후의 우리 부부에게 이번 여름휴가 계획은, 없다. 사실 여름휴가를 맞아 여행을 간다는 개념이 사라진 것은 벌써 몇 년 됐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족의 생애 주기상 자연스럽게 그런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
|
| ▲ 길을 찾는 것이 여행 큰아들이 다섯 살 때 샌디에고 동물원에서 지도를 펼치고 길을 찾고 있다. |
| ⓒ 송유정 |
큰아들의 입시가 끝나고 뒤이어 작은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작은 아들의 입시가 끝날 즈음 큰아들이 입대했고 큰아들이 제대하자 작은 아들이 입대했고 현재 군 복무 중이다. 작은 아들이 휴가를 나오더라도 네 식구가 모여 밥 한끼 먹는 일조차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
|
| ▲ 설렘 가득한 뒷모습 인생 첫 비행기를 타는 두 아이의 설레던 뒷모습. |
| ⓒ 송유정 |
일단 여행을 가면 남편도 좋아했지만, 해외여행에 대한 남편과 나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남편은 어린 자녀들이 기억도 못 할 텐데 뭣 하러 돈 들여 헛고생하냐고 했다. 그 돈을 아껴 아이들이 컸을 때 원하는 곳에 가고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지원하는 게 더 합리적인 부모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경험 기억'이라는 말로 응수했다.
|
|
| ▲ 물놀이는 필수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물놀이가 빠지면 섭섭하다. 물놀이를 해야 잘 놀았다고 생각한다. |
| ⓒ 송유정 |
낯선 곳에서 어눌한 언어로 소통하며 길을 헤매고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보는 일련의 과정을 나누다 보면, 예전의 우리로 잠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족보다는 친구를 선호하고 함께 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춘기 자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던 것이다. 아이들의 경험 기억을 이어가려던 우리 부부의 노력이었다.
노력에는 대가가 따랐다. '먼 훗날 좋은 시간을 함께했던 우리를 기억해 주길'이라는 부모의 바람은 빚 없이는 시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래를 담보 잡고 강행했던 무리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해도 소용없어서가 아니라, 후회할 필요 없을 정도로 후한 이자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행은 분명히 소비가 맞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생산이다. 추억을 땔감 삼아 오늘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나를 위한 여름 휴가를
언제까지나 네 식구가 똘똘 뭉쳐 산으로, 들로, 이 나라 저 나라로 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시간은 끝났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우리 부부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자녀들과 아침부터 밤까지 물놀이를 해주던 젊은 부부는 이제 없다.
돌이켜보니 우리는 바깥 활동이나 여행을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자식을 위해 한껏 외향적인 척 연기를 했다는 게 맞다. 어쩌면 우리는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서 비로소 우리가 원하던 여름휴가를 맞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년 동안 남편은 여름휴가를 자기 계발의 시간으로 활용했다. 코로나와 함께 시작한 자격증 공부를 휴가 때 집중적으로 했다. 남편이, 아빠가 여름휴가 여행 대신 도서관을 선택한다 해도 섭섭해하는 가족은 없었다. 온전히 자신에게만 쓸 수 있는 휴가 덕분이었을까, 남편은 경영지도사, 가맹거래사, 공인중개사 세 개의 자격증을 연이어 취득했다.
나에게 여름휴가는 읽고 싶던 책을 몰아 읽고 보고 싶던 드라마를 몰아보는 시간이었다. 프리랜서 토론 강사라 학교가 방학하는 7월 중순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한 뒤에 맞이하는 꿀맛 같은 휴식을 즐겼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남편과 점심시간에 만나 간단히 한 끼를 때웠고 저녁에는 동네 치킨집에서 치맥을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 어렸을 때 갔던 휴가지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땐 이랬지, 그랬지'를 경쟁적으로 얘기하며 중년 부부의 휴가가 저물어갔다. 추억은 긁지 않은 복권이었다. 수백 장을 쌓아두고 하나씩 하나씩 긁어보면, 한 장 한 장이 1등 당첨 복권이었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우리 부부가 서로 기분 좋게 나누던 대화의 끝은 다시 '경험 기억'에서 갈렸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소비를 생산이라 생각한다. 반면 남편은 그때의 소비가 미래를 갈아서 만든 것이라며 후회를 한다. 이래서 부부는 로또라고 하나보다. 안 맞는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진짜로 둘이 손잡고 로또 명당 탐방을 해볼까? 아이들을 위해 미래도 담보 잡히고 우리의 에너지도 총동원했던 여행에서 벗어나, 생산적이면서 우리에게 집중하는 여행을 계획해 봐야겠다. 먼 훗날 노부부가 되어 긁어볼 경험 기억 복권 한 장도 적립하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재명노믹스 본격 시작… 31조 8천 억 돈 풀린다
- 박제된 국민의힘 구의원들... '해수부 이전 부결' 파장 계속
- 안타까운 명성황후의 편지... 20대 중국 관료의 충격적 행태
- '기자들 얼굴 보이는 브리핑', 기자들이 전혀 싫어하지 않는 이유
- "윤가한테 찍소리도 못하는 선배님, 이젠 부끄러워지려 해"
- 윤석열, 5일 오전 9시 1분 서울고검 도착... 내란특검 2차 조사 시작
- 이 대통령의 반문 "신용불량으로 7년 살아보시겠나"
- [오마이포토2025] 윤석열, 내란 특검 소환조사 출석… 모든 질문에 '침묵'
- 경남 찾은 정청래 "이재명정부 쌩쌩 달릴 수 있게 힘 모아달라"
- 농민의길, 김 총리 면담 뒤 대통령실 앞 노숙농성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