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감독도 충격 받았다는 이 장면, 보러 오세요
[하성태 기자]
"외삼촌이 좋냐, 친삼촌이 좋냐."
외할머니가 외손주에게 묻고 또 묻는다. 자꾸만 외손주 아랫도리 안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외삼촌을 꼭 닮았다"고 무언가를 확인받으려 한다. 납득은 간다. 외삼촌은 국군이고, 친삼촌은 인민군 편에 섰다.
김훈의 소설 <광장>에서처럼 할머니에겐 남으로 갈 것이냐 북으로 갈 것이냐를 선택할 겨를도 여유도 없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한국전쟁이 한창인 남도의 시골 마을에서 아들과 사돈 총각을 반대 진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속절없는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고 유현목 감독이 1979년작 <장마>에서 물은 질문이다.
"비야 쏟아져라! 어서 더 쏟아져서 숨은 빨갱이 쓸어 가그라!"
그런 외할머니가 폭주한다. 그 폭발의 발단에 실체라도 있었다면 좋으련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 할머니가 악몽을 꿨다. 평소 영험함을 자랑하던 할머니였다. 오비이락일까. 심상찮은 장마비 탓인지 이빨까지 하나 빠져버렸다.
유현목 감독은 첫장면에서 이걸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찍었다. 하나뿐인 아들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공포 그 자체다. 그 공포는 좌냐 우냐와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쟁 통에 더부살이 중인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반목과 갈등이 시작된다.
한국 문단의 거목 윤흥길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장마>는 소년의 눈으로 본 전쟁으로 인한 이데올로기 대립과 그 대립의 대리전을 침착히 다룬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인 유현목 감독의 후기작 중 하나다. 외할머니를 연기한 대배우 황정순의 연기는 다시 봐도 일품이다. 한정된 공간 속 인물들을 갈등을 유려하게 잡아낸 이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이었다.
소위 반공영화가 판치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황해도 출신으로 실향민인 유현목 감독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장마>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마>를 개막작으로 선보인 '유현목 탄생 100주년전: 시대, 장르, 실천'이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 원장 김홍준)에서 오는 5일(토)까지 진행된다. <오발탄>으로 유명한 유 감독의 작품 세계를 넓고 깊게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리다.
|
|
| ▲ 한국영상자료원이 유현목감독탄생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영화의전당과 개최한 '유현목 탄생 100주년전: 시대, 장르, 실천' 특별전. |
| ⓒ 한국영상자료원 |
지난달 26일 기획전 개막식에 참석한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의 설명이다. 영상자료원이 유현목감독탄생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영화의전당과 함께 마련한 이번 기획전은 <오발탄> 등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을 넘어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아온 코미디, 아동영화, 실험 영화가 보여주는 폭넓은 스펙트럼과 미학, 그리고 스승이자 제작자로서의 활동과 사회적 실천성을 아우른다.
또 지난 2022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발굴돼 관심을 모았던 미발굴작 <임꺽정>(1961)을 최초로 소개한다. 영상자료원 측은 "<오발탄>과 같은 해에 제작된 이 작품은 홍명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극 영화로 그동안 영상자료원에서 필름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며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보유 중인 35mm 영문 자막 프린트 형태로 발굴하여 4K 디지털 복원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또 1965년작 <순교자>도 이번 기획전에서 디지털화 완료 후 함께 소개됐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번 기획전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기도 했다. 유현목 감독의 연출작 16편을 포함해 총 18편을 준비한 이번 기획전 중 개막작 <장마>를 포함해 <오발탄>(1961), <순교자>(1965), <장마>(1979), <사람의 아들>(1980)은 디지털/복원 DCP(2K/4K) 버전으로, <분례기>(1971), <그대와 영원히>(1958), <몽땅 드릴까요>(1968), <말미잘>(1994)은 당시의 질감과 공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35mm 프린트로 상영됐다.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인 유현목 감독은 한국 영화운동의 시작을 함께 했고 직접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64년 씨네포엠이라는 실험영화동호회를 만들었고 1978년엔 동서영화동우회를 통해 초기 시네마테크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부터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번 특별전에 여러 방식으로 참여한 김성수 감독, 김대현 감독, 양윤호 감독, 정재형 교수 등이 모두 동국대 출신들이다. 이중 지난 2일 <오발탄> 상영 이후 라운드 토크를 통해 관객들과 직접 만난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이 회고한 스승 유현목 감독의 모습은 이랬다.
|
|
| ▲ '유현목 탄생 100주년전: 시대, 장르, 실천' 특별전 <오발탄> 상영 후 라운지 토크에 나선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 |
| ⓒ 하성태 |
<오발탄>을 상영한 한국영상자료원 KOFA 상영관이 열기로 가득 찼다. 젊은 학생 관객부터 장노년층까지 평일 한낮 상영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한국영화 걸작들 중 1, 2위를 다투는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을 보기 위해 이번 기획전을 찾은 관객들도, 유현목 감독의 동국대 대학원 제자 김성수 감독도 설레기는 매한가지였다.
김 감독은 <오발탄>을 처음 본 날 외국어대학교 교정에서부터 종로까지 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오래 걸었는지 잊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다"와 같은 충격이 26살 영화 감독 지망생 김성수를 강타했다고 한다.
소위 토속물과 에로물이 판치던 충무로 상업영화 판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던 김 감독은 그 길로 유현목 감독을 찾았고, 동국대에서 강의 중이던 유 감독을 따라 김성수 감독도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조차 영화적이었던 셈.
"80년대 선생님한테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저희들 세대 역시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운동도 하고 영화도 만들었다. 지금도 그런 훌륭한 감독들이 계시고. 유현목 감독님은 '너희들이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다면 너희들 영화가 현실을 정말 잘 담아야 한다'는 얘기를 아주 많이 하셨다. 그 말씀이 저한테 굉장히 절실하게 다가왔다. <오발탄>은 그 어떤 네오리얼리즘 거장들 작품들과 비교해도 못하지 않다."
탄생 100주기를 맞아 마련된 유현목 감독의 특별전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오발탄>을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남녀노소 관객들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열띤 호응에 김성수 감독도 이날 놀라움을 표했다. 저 멀리 60여 년 전, 20세기에 만들어진 거장의 영화들을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리지 않고 오래 보존하고 감상해야 할 이유가 또 한 번 확인됐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마음 울리는 이 대통령의 3가지 장면...그럼에도 걱정되는 이유
- "우리 언제 또 보는 거야?" 호주식 '워라밸'의 독특한 풍경
- '내란 옹호' 강준욱 비서관, 과거 강연에서 "음주운전 처벌하면 안 돼"
- "삼부 체크" 이종호, 취재진 따돌리고 비공식 출입구로 특검 출석
- 낮엔 학생 밤엔 무당, 편견 속에서도 그녀가 꿋꿋한 이유
- 여행지도 안 정했는데 가이드북부터 사겠다는 직장인들
- [단독] 이종섭에게 전화 건 사람은 김건희 아닌 윤석열
- '마른장마'라더니 물폭탄... 왜 이런 혼란이 생겼냐면
- [오마이포토2025] 민주노총, 노조법 2·3조 개정 촉구 국회 농성 돌입
- 'MBC 소송, 엑스포 올인'... 취임하면서 사과부터 한 조현 외교부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