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없던 1500년 전, 무더위 이겨낸 선조들의 지혜
[임영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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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보물로 지정된 창녕석빙고.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서(申曙)에 의해 지어졌다 |
| ⓒ 국가유산청 |
이러한 이상기후 현상은 생태계뿐만 아니라 건강과 일상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앞으로 여름은 어떻게 변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다. 당장 올해 여름은 또 어떨까. 기상청의 예보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올해도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지는 엘리뇨 현상에 따른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으로 기록적 더위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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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겨울 꽁꽁 얼어붙은 한탄강의 얼음 |
| ⓒ 유영남 |
그렇다면 에어컨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옛사람들은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옛날에도 얼음을 맛볼 수 있었을까.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겨울에 얼음을 보관해 두었다가 이듬해 봄, 여름까지 사용할 수 있는 얼음 창고가 있었기에 한 여름에도 얼음을 쓰는 일이 가능했다.
인류는 언제부터 얼음 저장했을까
야생에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면서 거칠게 생존하던 인류는 1만 2천여 년 전부터 농업 경작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확보하게 되었고, 잉여 농산물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만들었다. 이후 문명의 발전과 함께 여러 형태의 창고가 탄생했다. 그중에는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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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아바쿠에 있는 야크찰 |
| ⓒ wikimedia commons |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문명이 맨 먼저 발생한 중국에서 기원전 11세기 이전에 겨울에 생성된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했던 기술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일본은 이보다 훨씬 늦은 시기인 기원후 4세기 인덕천황(仁徳天皇 재위 313~399년) 시기에 황실에 빙고(氷庫)를 설치했다는 내용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의 기록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온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우리나라에서 얼음을 저장했던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제3대 유리왕(재위 24년~ 57년) 때 "쟁기와 보습(쟁기의 바닥에 붙이는 삽날 모양의 쇠붙이)을 만들고 '장빙고(藏氷庫)'를 지어 얼음을 저장하였으며 수레를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는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창고가 있었고 '빙고전(氷庫典)'이라는 관청이 이를 관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우리의 빙고 역사는 중국보다 늦고 일본 보다는 약 300여 년 빠르다고 할 수 있다. 대개의 문명이 그렇듯이 중국에서 시작된 얼음 저장 기술도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사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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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보물로 지정된 경주석빙고.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나무로 된 목빙고를 석빙고로 개축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석빙고 중에서 가장 크고 전형적인 축조 방식으로 지어졌다 |
| ⓒ 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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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석빙고의 외부 환풍구 |
| ⓒ 국가유산청 |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보다 발전적 형태의 얼음 창고가 탄생했다. 태조 5년 (1396년)에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동빙고(東氷庫)'와 용산 부근의 한강변에 '서빙고(西氷庫)' 그리고 궁궐 안에 두 곳의 '내빙고(內氷庫)'를 둬서 얼음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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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동빙고터와 사한제를 지냈던 사한단 터 |
| ⓒ 성동구청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18세기 각 지방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지방에도 30여 곳의 빙고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빙고는 대부분 나무나 짚으로 만든 '목빙고(木氷庫)'나 '초개빙고(草蓋氷庫)'였다. 이후 점차 발전하여 조선후기에 돌로 지은 '석빙고(石氷庫)'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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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국보유적 제69호로 지정된 황해도 해주석빙고 |
| ⓒ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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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보물 청도석빙고.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연대도 오래됐다. 양쪽 벽을 이어주던 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
| ⓒ 국가유산청 |
먼저 땅을 파서 반 지하 공간을 만들고 돌로 바닥과 벽을 쌓은 후 공기 순환이 잘 되도록 아치 형태의 천장을 만든다. 반지하 구조는 바깥공기 온도가 높아지더라도 실내 온도는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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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녕석빙고 지붕. 외부로부터 열기를 차단하기 위해 흙과 돌을 쌓고 석회를 사용하여 다진다음 잔디로 봉분을 올렸다. 마치 무덤처럼 보인다 |
| ⓒ 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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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석빙고 내부. 천장은 아치 형태이며 3곳에 환풍구를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
| ⓒ 국가유산청 |
얼어죽기도... 백성들 피땀으로 채운 얼음 창고
그렇다면 석빙고에 저장한 얼음은 얼마나 됐으며 어떻게 사용했을까. 매년 음력 12월이 되면 먼저 '사한제(司寒祭)'라는 제사를 지낸 후에 얼음을 채취했다. 채취한 얼음은 동빙고에 1만 여 정, 서빙고에 13만 5천 여 정, 그리고 내빙고에 4만 여 정을 저장하였다. 얼음 1정은 길이 45Cm, 너비 30cm, 두께는 21cm로 약 20 kg 정도였다고 하니 서빙고에 저장한 얼음의 양은 엄청났다.
이듬해 춘분이 되면 얼음 뜰 때와 같이 사한제를 지낸 다음 빙고의 문을 열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얼음을 나눴다. 먼저 궁궐과 각 관아에서 쓸 얼음을 분배한 다음 정2품 이상의 문무 관료들과 종친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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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철 한강철교 밑에서 채빙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1930년대 이후 위생상의 문제로 채빙은 금지되었다 |
| ⓒ 서울역사박물관 |
18세기말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얼음 수요가 많아지고 국가가 운영하는 빙고가 축소되면서 일반 백성들도 자유롭게 얼음을 사고팔 수 있도록 사빙고를 허용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0년대 일제에 의해 현대식 제빙공장과 빙고가 만들어지면서 우리의 전통 석빙고는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유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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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 어귀에 있었던 얼음집. 대부분 석유집과 함께했다. 여름엔 얼음을 팔고 겨울엔 난방용 석유를 팔았다. 그 많던 얼음집은 다 어디 갔을까 |
| ⓒ 한국근현대역사박물관 |
올해 여름도 작년 못지않게 무척 더울 거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인공적인 시설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했던 옛사람들의 지혜를 본받아 자연 친화적인 건강한 여름 나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격월간 문화매거진 <대동문화>149호(2025년 7, 8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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