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의 마음 읽기] 전쟁놀이

2025. 7. 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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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1996년 9월의 끝자락, 대관령 골짜기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집 한 채만 있는 골짜기였다. 자정 넘어 갑자기 대문 앞에 묶어놓은 개가 짖기 시작했다. 또 산짐승이 내려온 모양이었다. 냉장고 앞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베고 잠을 자던 아내는 잠결에 돌아누웠다. 보통은 짖다가 마는 게 개였다. 그날은 달랐다. 멈추지 않았다. 점점 더 사납게 짖었다. 안방에서 술에 취해 자던 남편도 일어났다. 잠이 덜 깬 남편은 거실의 시계를 본 뒤 비틀거리며 파자마 바람에 마당으로 나갔다. 볼일을 보러 나간 것이다. 그런데 들어올 시간이 지났는데 들어오지 않았다. 모로 누운 채 이 생각 저 생각을 건너다니던 아내는 잠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다. 겁이 덜컥 났다. 강릉 바닷가에서 좌초된 북한 잠수함을 빠져나온 공비들이 아직 도망 중이라는 걸 비로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개는 계속 짖었고 아내는 거실의 어둠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렸다. 온갖 상상에 사로잡힌 채.

「 공비 침투 잦은 강원 산골에서
전쟁놀이 하며 자라 교련 교육
지구촌 전쟁은 멈출 줄 모르니

김지윤 기자

강릉 산악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군과 공비들의 교전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공비들이 강릉 일대를 벗어났다는 보도가 나온 뒤 객지에 나가 살던 나도 예비군에 동원되어 대관령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강릉에서의 오발 사고 이후로 예비군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우리는 빈 총을 들고 캄캄한 산속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매복을 섰다. 실탄도 없는데 도주 중인 공비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은 죽고 살기로 도망치는 공비들이었다. 중대장에게 그 얘길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혹시 모를 오발 사고를 방지하려는 조치였겠지만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창은 1968년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침투 때 이승복 가족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기에 주민들의 우려는 남달랐다. 그때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바람은 어긋났다. 국군의 저지선인 영동고속도로를 통과한 잠수함 잔당들은 10월 초 오대산 자락에서 버섯을 채취하던 민간인 세 명을 살해하고 북쪽을 향해 도망쳤다. 온 마을 사람들이 가슴 아파했다. 잔당들은 백두대간을 이용해 인제의 휴전선 근처까지 도주하다가 11월 초 사살되었고 마침내 사건은 종료되었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산골 사내아이들의 놀이 중 하나가 전쟁놀이다. 나무총을 든 우리들은 마을 인근의 녹음이 무성한 산으로 들어가 싸리나무를 엮어 철모 대신 만들어 쓰고 텔레비전 드라마 ‘전우’와 가설극장에서 본 전쟁영화를 흉내 내 전쟁놀이를 했다. 아무도 북한군을 맡으려 하지 않았기에 가위바위보로 편을 나눴다. 총알이 없으므로 상대방을 먼저 발견한 사람이 땅! 하고 외쳤다. 상대편이 모두 죽으면 끝나는 놀이였다. (죽다니! 진짜는 아니지만 참 잔인한 표현이다.) 간혹 6·25 전쟁 때 파놓은 참호에서 녹슨 탄피를 주웠다. 바람에 날려온 삐라는 산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잘 모아두었다가 개학 날 파출소에 갖다 주고 학용품을 받았다. 학교에서도 전쟁놀이(?)는 계속 이어졌다. 반공 웅변대회, 글짓기 대회, 표어 대회…. 자라나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는 교련복을 입고 총검술을 익혔다. 신체검사를 받고 군대에 갔다. 그 시절 자주 꾸는 악몽 중의 하나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전쟁이 나는 꿈이었다.

지구촌에 전쟁이 멈추지 않는다. 많은 참혹한 전쟁이 지나갔고 새로운 전쟁이 발발한다. 이스라엘, 중동의 국가들, 인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인간은, 아니 위정자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정녕 전쟁 없이 인간은 살 수 없을까?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마치 전쟁놀이하듯 전쟁을 대하는 위정자들을 보면 할 말이 없다. 나 역시 누군가의 생사가 오가는 전쟁을 내 일이 아니라고 구경이나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해 가을밤 볼일을 보러 나갔던 늙은 남편은 집 뒤편 비탈밭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즉시 건넛마을 반장 집으로 달려가 신고했다. 확인 결과 그들은 공비가 아니라 야간수색에 나선 국군이었다. 반장이 늙은 아내만 있는 골짜기 외딴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집으로 건너오지 않고 왜 아직 거기 있대요?” “술 마시고 계세요.” “저 혼자 살겠다고 빤스 바람에 도망친 양반이 술을 마신다고요?” “하하하! 예.” “오지 말고 아예 거기서 살라고 전해줘요.”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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