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사벽 천재 이을호, 스스로 운동권이 되다

권형택 2025. 7. 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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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두꺼비열전] 민청련의 제갈량 이을호2

[권형택]

이을호는 1955년 전북 부안군 하서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영로는 동학의 일파인 태을교 교주였다고 한다. 증산교 교주 강증산이 진인으로 불렀을 정도로 도가 높았다. 아버지 이중학도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동학에도 조예가 있었고,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식견이 높았다.

일찍이 자신은 세상일을 다루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호를 세무제(世務齊)라 짓고, 세속의 일에 힘썼다. 면장을 20년이나 역임했고, 재산을 많이 모아 부유하게 살았다. 풍수지리에 밝아 풍수 좋은 곳에 여기저기 넓은 땅을 마련했고, 이 땅들을 해방 후 토지개혁 때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자였지만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고 살아서 6.25 때도 좌익들에게 잡혀갔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전주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이을호
ⓒ 민청련동지회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조숙해진 이을호

어머니 김남근은 후처였는데 이중학과 결혼하여 이을호와 이원호 형제를 낳았다. 어머니도 초혼이 아니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사별한 전 남편은 빨치산 운동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 제삿날 집에 돌아와 사람을 만나다가 밀고를 당해 경찰들의 총탄 세례를 받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남편을 잃고 딸 둘을 데리고 온갖 장사를 하면서 근근히 연명을 했고 마지막에는 거의 걸인이나 다름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주변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이 본처에게 이을호의 배다른 누나가 다섯, 배다른 형 둘이 있었다. 어느 날에는 집안에 슬픈 일이 일어났다. 이을호가 열 살 때, 3년 아래인 일곱 살 먹은 유일한 친동생 이원호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이을호는 평생 그 동생을 잊지 못했고, 틈이 나면 가족들에게 그 동생이 어떤 아이였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2등과 20점 차이 전교 1등생

이을호는 1961년 부안 하서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정읍 고부국민학교로 전학해서 67년 졸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북중에 시험쳤지만 낙방했다. 고부중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오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웬일인지 이을호를 중학교 진학을 시키지 않고 집에서 한학 공부를 하도록 했다. 한학에 조예가 있던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과 사서삼경, 그 중에서도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놓고 깊은 토론을 자주 하였다.

주위에서 고등학교에 갈 것을 권유하여 이을호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강의록으로 준비했다. 3년 반을 준비한 끝에 1970년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까지 이을호는 폭넓은 독서와 아버지와의 토론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키워갔다.
 위 사진, 전주고 2년 시절 부름독서회 회원들. 윗줄 맨 왼쪽이 이을호 아래 사진, 전주고 3년 시절 고전독서회 회원들.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을호
ⓒ 민청련동지회
1971년 3월 이을호는 호남의 명문 전주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이을호의 천재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입학 후 첫 시험에서만 전교 720명 중 2등을 했을 뿐 이후 졸업 때까지 3년을 내리 1등을 했고, 그것도 2등과의 격차가 평균 20점 이상 나는 압도적 1등을 했다. 그렇다고 학교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검정고시 준비하는 시기 동안 중학교 과정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전 과정을 이미 다 섭렵한 터라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고, 그 대신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을 독파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로를 철학으로 결정하게 된다.

이을호의 천재성은 학교 성적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이을호는 '고전독서회'와 '부름' 이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에도 참여했는데, 이 모임들에서도 항상 시대를 앞선 진보적인 생각을 이야기해서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2년 10월에 대통령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한 '10월유신'을 단행했다. 그 직후에 전주고등학교에서 채수찬(후에 17대 국회의원), 소병훈(후에 20,21,22대 국회의원), 박경희(후에 지양사 출판사 운영) 등 의식 있는 3학년 학생들이 주동하여 유신반대 시위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교사와 교직원들의 적극적인 저지로 시위가 초동에 저지되었지만 3명의 학생이 제적되고, 여러 명이 무기정학 등 징계를 받았다.

이을호는 이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을호는 그 뒤에 독서회 등에서 뜻이 맞는 친구 몇 명과 학내시위를 모의하고, 실제 구체적인 준비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정에서인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천재의 정신 세계, 신비주의로 치닫다

1974년 3월 이을호는 서울대 전교 차석의 성적으로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성적은 학년에서 톱을 달렸다. 2학년 과 배정을 받을 때가 되자 집안에서는 법대로 갈 것을 기대했지만 이을호는 자신이 일찍이 정해 두었던 철학과를 지망했다. 그리고 보다 집중적으로 철학서를 탐독했다.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숙독했고, 한때는 괴테의 '조화정신'에 매료되기도 했다.

독서와 사색 속에서 대학생활을 꾸려가던 그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지나친 사색과 서울 삶의 긴장이 겹친 탓인지 1학년 후반기부터 신비주의적 정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1974년 12월경 갑자기 혼절하여 병원에 실려갔고, 이듬해 1975년 3월초까지 정신병원 및 민간치료소를 전전하며 신비체험, 혹은 병리적 이상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을호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1학년 때까지를 사춘기 이상주의와 결합된 인간 및 자연, 사회에 대한 철학적 사색의 시기였다고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이을호는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우주의 비밀스러운 것에 대한 특별한 접근으로 이해했다.

대학 2학년 이후에도 그의 영적, 지적 탐구는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비주의적 기질과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세계관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했다. 그 과정에서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고, 노장철학, 불교철학, 종교학, 자연과학적 심리학, 물리학, 사회학 등 다방면의 많은 지식을 섭렵했다.

인문대 4인방의 유신반대 시위

이을호가 4학년이 되는 1977년 봄, 서울대 인문대 교지 <지양>의 편집실에 4명의 4학년 학생들이 모였다. 이을호와 철학과의 김영현(후에 소설가), 미학과의 김태경(후에 <이론과 실천> 출판사 운영), 국문학과의 김사인(후에 시인)이었다. 각기 관심 분야가 다르고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인문학도였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운동권을 주도했던 이념서클 출신들처럼 조직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자생적으로 모여 냉소하고 자학하며 실존적 고민을 한 문사들이었다.
 위 사진, 서울대 인문관 앞에서. 왼편 앞에 앉은 이가 이을호 아래 사진, 철학과 MT 때 찍은 사진. 왼쪽 끝 체크무늬 양복 입은 이가 이을호
ⓒ 민청련동지회
김영현과 김사인은 <지양>의 창설 멤버였다. 대구 경북고를 졸업한 김영현은 1976년 대학문학상에 단편 '닭'이 입선해 문학적 소양을 인정받았고, 김사인 역시 <대학신문> 등에 여러 차례 시를 발표하여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중에 한국 사회과학 출판계의 거물이 된 김태경은 이 무렵 이미 출판에 눈을 떠 대학가에 지하출판물을 공급하는 영향력 있는 공급책이 되어 있었다. 학교 성적이 전 과목 A⁺학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고 동서 고금을 넘나들며 해박한 지식과 청산유수 같은 언변을 구사하는 이을호는 이들 세 사람에게도 이미 '전설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이을호는 네 사람의 모임에서도 항상 토론을 주도했고, 토론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 뛰어난 4명의 '문사'들은 자주 편집실에 모여 김태경이 공급하는 유인물과 지하출판물들을 읽고 토론하면서 급격히 의식화되고 급진화되었다. 그들은 선배들로부터 학생운동을 권유받지 않았지만, 자유정신이 충만했던 그들이기에 자연스럽게 유신체제의 폭압적인 독재권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실존적 결단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1977년 봄부터 은밀하게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반대하고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고 학내에 배포하기로 합의했다. 상황에 따라서 학내시위도 벌일 계획이었다. 4인방에서 가장 앞서 가는 사람은 불같은 열정을 가진 김영현이었다. 이을호는 학군단(ROTC) 생도이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신중한 입장이었다. 선후배 운동권 인맥이 약했고, 개성들이 강해 일사분란한 행동이 어려웠던 이들의 거사계획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이들이 구체적인 시위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주춤주춤하는 사이에 학생들 사이에서 반유신 저항의식들이 점차 높아지고, 드디어 국사학과 4학년 김경택 등이 주동한 '11월 11일 학내시위 사건'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다. 11월 11일 사건으로 서울대에 반유신 시위의 회오리바람이 쓸고 지나간지 1주일 째 되는 11월 17일 저녁 무렵, 김영현이 형사에게 붙들려 관악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영현이 잡힌 이튿날인 11월 18일부터 서울대에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먼저 이을호, 김태경, 김사인 등 4인방이 잡혀 왔고, 이어서 김영현과 연결하고 있었던 75학번 그룹의 반병율, 이증연, 배남효 등이 잡혀 들어왔다. 11월 11일 사건으로 상부의 질책을 받고 있던 경찰이 먹잇감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잡혀온 이들은 '11·18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사건'으로 엮였고, 이을호를 제외한 모두가 재판에 회부되어 1년~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징역살이를 했다.

핵심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이을호가 구속을 면했던 것은 관악서 취조과정에서 정신병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을호는 구치소 대신 서부정신병원으로 옮겨져 감정유치 되었다. 그리고 이을호의 뛰어난 재능을 아까워한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탄원서를 내서 선처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 덕분으로 이을호는 감정유치 35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해 대통령상을 받을 예정이었던 졸업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다.

신혼,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

졸업 후 출판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이을호는 1983년 9월 민청련이 창립되자 기꺼이 활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활동 중에 평생의 짝이 될 여인을 만났다. 이화여대 출신의 최정순이었다.
 1984년 4월 흥사단에서 있었던 결혼식 사진. 뒤로 주례 백기완 선생이 보인다.
ⓒ 민청련동지회
1984년 4월 5일 이을호와 최정순은 흥사단 강당에서 백기완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험난한 역정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듯 "변증법적으로 살라"고 한 백기완의 주례사가 이채로왔다. 결혼식장은 두 사람의 선후배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최정순의 후배들이 운동가를 축가로 불러주었고. 하객 모두가 '상록수'를 함께 불렀다.

속전속결로 결혼식을 치르고 서울에서 하루를 묵은 뒤 강원도 설악산으로 2박3일 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속초 대명콘도에서 꿈 같은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최정순이 일찍 일어나 분홍원피스를 입고 고기를 굽고 밥을 해 아침상을 차렸다. 이을호는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이 이렇게 편하게 대접받고 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두 사람은 새로 얻은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이을호 어머니는 성정이 착할 뿐 아니라 음식도 잘하고 살림을 아주 깔끔하게 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떠받들었으며, 아울러 생활력 있는 듬직한 새 며느리도 귀하게 여겼다.

이을호는 결혼 전 최정순과 서약을 맺었다. 그 중에는 이을호가 운동에 전념할 동안 최정순이 경제를 책임진다는 조항이 있었다. 최정순은 서약대로 자신이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벌어와야 했기 때문에 시어머니와 한가지 약속을 했다. 모든 집안 살림은 시어머니가 맡고 그 대신 자신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도 이 약속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후에 이 역할 분담은 충실하게 지켜졌고, 고부간에 충돌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혼 후 이을호는 최정순에게 예고한대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민청련 일에 전념했다. 그리고 최정순은 웅진출판사에 나가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집안 살림은 시어머니가 도맡아 했다. 85년 1월에는 첫 아들 준의가 태어나 집안의 기쁨을 더했다. 아기를 돌보는 일도 시어머니가 도왔다. 최정순은 직장생활과 육아에다 아울러 민청련의 이화여대 조직을 책임지고 있어 늘 분주하게 지냈다. 그러나 기쁘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을호가 구속될 때까지 이런 생활이 1년 6개월 지속되었는데 이 시간을 최정순은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의 시간은 찾아왔다. 1985년 6월 김병곤 구속을 시작으로 민청련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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