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의상대사 탄신 1400주년을 맞아

장마철엔 숲은 짙은 푸름으로 가득하고, 하늘은 검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오늘은 문득 엷은 구름 사이로 밝은 달님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선방에 앉아 8일 동안 오롯이 정진의 시간을 보냈다. 수행 중에는 더 깊은 차의 맛과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밥 먹는 시간조차 고요하고 느릿해지니 밥 한 그릇과 구수한 된장찌개 한 숟가락, 상추쌈 한장이 그저 고마움으로 다가온다. 까슬까슬 풀 먹인 좌복은 저절로 수행자를 미소 짓게 하고, 숨 한 번이 고요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할 뿐이다. 풀 한 포기 없이 정갈한 뜰에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 한 올이 시원하기 짝이 없다.
청아한 바람마냥 7박 8일이 훌쩍 지나갔다. 함께 참선 정진한 열여덟 명의 수행도반들이 다시 태어난 듯 해맑게 미소 짓는다. 독일 베를린, 캐나다 토론토, 제주도, 서울 등 멀리서, 가까이서 인연 따라 모여든 반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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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본성은 청정 고요하니…”
의상 법성게 8일 참구하고 나니
선방에 부는 솔향 바람 한 줄기
」

“명상, 참선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몸을 움직이거나 다른 매체의 도움 없이 나의 천만가지 망상을 떨쳐낼 수 있을까? 내가 나를 고요함 속에서 만나면 너무 싫지는 않을까? 견딜 수 있을까? 시간, 공간적 연기적 관계성에 관한 법문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아, 내 마음과 정신이 항상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가 있었구나’ 하고 좌선하면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구 반대쪽 베를린에 가 있는 내 정신, 상상들은 정말 시간 낭비였습니다.” (이○○)
“이른 새벽 좌복 위에 앉았다. 주변의 고요함 속에 깊이 들어갔다.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들리는 소리를 누가 아는가. 보이는 건 무엇이 아는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아는 것은 누구며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하며 들어가자 허리에서 미미한 움직임이 생기며 척추가 펴졌다.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듣고 싶은 마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모든 것을 다 아는 이것은 무엇인가?” (신○○)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추측 상상일 뿐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좌복에 앉던 중에 ‘아, 내가 정말 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구나, 안다고 생각하고 착각했을 뿐이구나, 공부했던 지식에 내가 집착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올라오며 마음이 가벼워지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 이후로는 오로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수행을 마친 도반들의 마음에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 변화만으로도 향후 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마음수행의 핵심사상은 신라 의상스님이 지은 ‘법성게’의 구절에 있다. “우리의 본래 성품은 스스로 청정하고 원융하여, 상황과 모양에 따라 움직임이 없이 항상 고요하다. 이름을 짓거나 모양으로 그릴 수 없다. 모든 것이 끊어진 무분별지이다. 이것은 깨달아 아는 지혜이다.” 이렇게 시작한 법성게는 한문으로 30구 210자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의 현대명상 뿐이 아니라, 한국의 조사선과 화두선의 근간도 이 법성게의 첫 구절이 목표지점이다.
의상스님(625~702)이 법성게를 짓게 된 배경은 스승으로부터 60권 화엄경 10년 동안 공부를 마치고, 화엄경을 요약하여 『대승장』 10권을 편집하였으나 그 또한 번다하여 불을 태웠고, 불에 타지 않는 210자를 모아 법계도기라는 그림과 게송으로 엮은 것이다. 법성게는 한국의 스님들은 반야심경처럼 매일 암송을 한다.
지난봄 KAIST에서 영어본으로 『Buddhism, Digital Technology and new media in Korea-Uisang’s Ocean Seal Diagram(의상의 법성게와 해인도의 현대적 응용)』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통섭을 통한 현대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명상과학연구소 소장 미산 스님은 밝히고 있다.
올해는 의상대사의 탄신 1400주년이다. 동국대 HK사업단과 BTN불교TV에서 의상대사를 주제로 하는 열 분의 특강과 총서발간을 기획하고 있다. 한국 철학사상의 뿌리와 같은 의상대사의 법성게의 무분별지와 중도의 사상이 학술로, 수행으로, 삶으로 다양하게 실천될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도반들이 떠난 빈 선방에 앉아 창문 밖에 펼쳐진 두두물물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펼치는 법문을 듣는다. 솔숲을 헤치며 솔향을 싣고 온 한 올 바람이 일어난다.
“첫 마음이 곧 깨달음/ 참 수행자의 마음/ 망상도 쉬지 않고 열반도 얻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갈 양식을 얻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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