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 없는 나라를 꿈꾸다'... 탕평 정치 선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6. 30. 11:4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즉위 5년 만의 탕평 정권 출범

[김종성 기자]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입구에 영조가 세운 탕평비
ⓒ 한국문화원연합회
어느 시대나 탕평 정치는 정치지도자들의 로망이었다. 51%의 리더로 남고 싶어 하는 지도자는 없었다. 지금은 양당제 국가인 미국의 초창기 지도자들도 탕평을 지향했다. 이들은 정당 자체를 아예 없애고 싶어 했다.

<한국동북아논총> 2001년 제18집에 실린 윤용희 경북대 교수의 논문 '미국 양당정치의 형성과 발전 요인'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정당과 도당을 동일시하여 합중국 전체 이익에 위반된다고 정당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였다"라며 "제3대 대통령 제퍼슨도 정당을 반대하면서 1789년 '만약 내가 꼭 정당과 함께 천국에 가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고 기술한다.

자유당이라는 악명 높은 정당과 함께 연상되는 이승만 역시 정부수립 전만 해도 정당 무용론을 내세웠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탕평 정치가로 기억되고 싶어 했던 그는 한민당과의 제휴가 깨진 다음 달인 1948년 9월 9일 담화에서 "민주주의를 운영하려면 우리에게도 정당이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의 홍범 편은 군주가 나라의 표준이 되는 '황극(皇極)의 정치'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일반 백성들이 은밀히 뭉치지 않고 높은 사람들이 뭉치지 않는 것은 임금이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치우침이 없고 당을 만들지 않으면 황도가 탕탕(蕩蕩)하고, 당을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으면 황도가 평평(平平)하다"라는 말로 황극의 실현 방법을 설명한다.

이 같은 '탕탕평평' 이념에 근접한 정치 질서가 한국에서 본격 구현된 것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다. 그와 그의 손자인 정조의 재위기는 탕평 정치의 모범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즉위 당시의 영조는 탕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후세에 탕평의 모범으로 기억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이복형이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1720년 7월 17일(음력 6.13)에 32세 나이로 왕이 됐기 때문에, 애초에 그가 즉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다수파인 노론당의 억지였다. 이들은 소론당의 지지를 받는 경종을 압박해 영조를 후계자로 세웠다. 경종이 아직 젊은데도 그에게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이복동생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만들었다. 이때가 1721년 10월 10일(음 8.20),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3개월 뒤였다.

노론당이 싫어하는 장희빈을 어머니로 둔 경종은 노론세력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1724년 9월 18일(음 8.2) 병석에 누웠다. 어의들의 치료가 시원치 않다며 자신이 해보겠다고 나선 그의 이복동생은 10월 6일에 게장과 생감을 먹이고 10월 10일에 인삼탕을 처방했다. 게장과 생감은 서로 상극이고, 인삼탕은 그날 경종이 먹은 탕약과 상극이었다. 경종은 10월 11일(음 8.25) 사망했다. 관행에 따라 닷새 뒤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당 임금과 소론당 조정의 동거 기간이 지난 뒤 노론당 정권이 등장했다.

이처럼 영조의 즉위는 치열한 당쟁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 영조의 이미지는 탕평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탕평의 의지를 갖는다고 해서 이뤄질 일도 아니었다. 노론이 지지해 줄 리 만무했다. 소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론과 한편인 군주를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즉위 당시에는 탕탕평평의 실현이 요원했다. '만약 내가 꼭 노론당과 함께 천국에 가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영조가 힘주어 말한다 해도, 믿을 사람은 별로 없었다.

탕평의 디딤돌이 된 '이인좌의 난'

그처럼 요원했던 것을 가능케 한 사건은 역사적인 내란이다. 즉위 4년 뒤인 1728년 4월 23일(음 3.15)에 소론당 강경파와 남인당 출신들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탕평의 디딤돌이 됐다. 이 난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난이었다. 이 점이 탕평 정치의 계기로 작용했다.

노론당의 지지를 받는 영조는 형님이 뽑은 소론당 대신들의 틈바구니에서 임금 생활을 시작했다. 노론당은 경종 재위기의 노론 숙청 사건인 신축옥사·임인옥사(통칭 신임옥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경종시대를 청산한다는 명분하에 정치적 복수를 벌였다. 이 같은 '전 정권 수사·재판'의 결과, 노론당이 조정을 차지한 것은 1725년 봄이다.

노론당이 집권한 그해부터 소론당 강경파와 남인당 인사들이 꿈틀댔다. 3년 뒤 남인당 이인좌가 소론당과 함께 벌이게 될 내란의 움직임이 이때부터 형성됐다. 이들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근거로 거사를 추진했다.

동인당의 분파인 남인당은 경종의 어머니를 지지했다. 서인당의 분파인 소론당은 남인당이 약해진 뒤 장희빈의 아들을 지지했다. 그래서 동인당 계열인 남인당과 서인당 계열인 소론당의 연합이 가능했다.

그런데 내란을 꿈꾸는 세력을 뻘쭘하게 만드는 일이 1727년에 있었다. 노론당의 과도한 '전 정권 수사'에 제동을 걸 목적으로, 영조가 소론당 온건파 중심으로 정권을 꾸린 정미환국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정권의 성격이 다소 애매해진 뒤인 1728년에 청주 출신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 부대는 청주성을 점령하는 일대 성과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충남북 전체가 공주와 청주를 압축한 공청도로도 불리고 충주와 청주를 압축한 충청도로도 불렸다. 이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청주는 지금의 충북뿐 아니라 충남북 전체에서 핵심적인 도시였다. 그런 곳을 점령했으니 이인좌 군대의 사기는 충천할 수밖에 없었다.

청주성을 점령한 반군은 충청도뿐 아니라 전라도·경상도에서도 호응을 받았다. 경상도에서는 반군이 합천을 포함한 4개 지역을 점령했고, 전라도에서는 전투는 없었지만 반군이 결성됐다. 농업경제를 주도한 충청·경상·전라의 삼남 지방에서 지지를 받은 이인좌는 청주성 점령을 발판으로 한양으로 북상했다.

그런데 이때 한양의 임금이 내놓은 대응법은 정미환국만큼이나 뜻밖이었다. 1589년에 집권 동인당 인사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은 정철을 비롯한 서인당 인사들에게 정권을 넘기는 방법을 구사했다. 영조는 이와 정반대 카드를 내놓았다. 소론당을 앞세워 내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영조의 대담한 선택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청주성 점령 이틀 뒤인 1728년 4월 25일(음 3.17)에 있었다. 음력으로 이 날짜 <영조실록>은 인상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영조는 실외에서 열린 것으로 보이는 이날의 어전회의에서 "병판에게 출정을 허락했다"라며 "수규(首揆)가 병조판서 일을 겸직해 살피도록 하고자 한다"고 발언했다.

병조판서가 도성을 비운 동안에 정1품이 병판을 겸직하게 하는 인사조치였다. 비상시국이었으므로 병판의 위상이 평소보다 높았다. 그런 병판의 업무를 영의정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영의정은 소론 지도자인 이광좌(1674~1740)다. 내란 진압의 총괄 책임까지 맡긴다는 왕명이 얼마나 황송한 것이었는지는 그의 반응에서 나타난다. 위 실록에 따르면, 54세의 이 영의정은 뜰 아래로 내려가더니 관모를 벗어놓고 고사의 뜻을 표시했다.

그러자 34세의 임금이 이조판서에게 말을 건넸다. 저분에게 관모를 건네주고 뜰 위로 올라오시게 하라는 당부였다. 그런 뒤, 영조는 올라오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나라 형세가 위급하다"며 경이 고사하면 300년 왕조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로 간절한 심정을 표시했다. 결국 이광좌는 병조사무 관장자라는 의미의 영병조사(領兵曹事) 직을 겸직했다.

소론 지도자 이광좌가 반란 진압을 책임진 가운데, 소론 인사인 오명항·박문수·조현명 등이 토벌작전에 나섰다. 한양 점령을 위해 경기도 안성과 죽산 방면으로 북상한 반군은 오명항이 지휘하는 정부군에 패배했다.

내란의 진압은 영조가 한층 강한 왕권을 갖는 밑바탕이 됐다. 또 소론을 앞세운 그의 대응법은 소론이 이 정권에서 확실한 지분을 갖는 계기가 됐다. 노론은 그를 왕으로 만들었고, 소론은 그의 왕권을 지켜줬다. 그의 선택으로 인해 노·소론 모두가 사실상의 여당이 된 셈이다.

영조는 이런 상태에서 이듬해인 1729년에 탕평 정치를 선언하고(기유처분), 일당 내각인 아닌 탕평 내각을 꾸렸다.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탕평 정권의 출발점이었다. 즉위 5년 만의 성과였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하에서는 당파를 표면에 드러내는 것이 금기시됐다. 여러 당파가 협치하는 형태가 아니라 어느 당파도 존재하지 않는 형식으로 전개됐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당파들이 수면 밑에서 활동해야 했다. 형식상으로나마 워싱턴이나 제퍼슨이 말한 정당 부정론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지지기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지도자가 형식적으로라도 집권당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영조가 정당들의 존재를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 탕평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왕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 숙종 때부터 왕권이 강화된 것, 당쟁의 부작용으로 인한 사회적 피해가 증대된 것, 조선-청나라-일본의 삼국관계가 평화로워 왕권이 안정된 것과 더불어, 야당인 소론당에도 과감히 지분을 주는 영조의 대담성 등이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