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강타한 끔찍한 물고문, 이을호는 무너졌다

권형택 2025. 6. 27.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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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두꺼비열전] 민청련의 제갈량 이을호 ①

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말>

[권형택]

1985년 9월 2일 5시 30분경, 이을호가 사는 고양시 능곡 집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주자 낯선 남자 서너 명이 "이을호씨 있느냐?"고 묻더니 느닷없이 이을호를 붙들었다. 두 명은 양 옆에서 팔을 잡고 책임자로 보이는 한 명이 앞에서 이을호의 허리춤을 혁대와 함께 움켜잡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너는 졌다"고 하면서 끌어다 검은색 승용차에 태웠다. 그들은 안기부 요원들이었다.
 이을호는 1985년 고문 이후 석방된 뒤에도 오랫동안 정신질환과 투병해야 했다. 사진은 2008년 2월 당시 모습
ⓒ 민청련동지회
집에 들이닥친 안기부요원들 "너는 졌다"

같은 해 7월 초 민청련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병곤이 구속되자 모두들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몸을 피했다. 이을호도 그랬다. 일주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그가 마침 이날은 아버지 제사가 있는 날이어서 그마저 거를 수는 없어 집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형님댁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안기부 요원들은 며칠째 이을호 집 앞에서 잠복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이을호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연행한 것이었다.

이을호를 태운 차는 남산에 있는 안기부 5국 지하조사실로 직행했다. 조사관들은 이을호가 남산 지하조사실에 도착하자마자 올빼미복(군 훈련소에서 입는 훈련복으로 이름표나 계급장 등 아무 표지도 없는 맨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다짜고짜 이범영의 소재를 대라며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범영은 민청련의 핵심 활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안기부의 관심사는 일차적으로 삼민투(전국학생총연합의 산하의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을 행동 목표로 하는 투쟁조직)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던 이범영을 체포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새도록 한잠도 재우지 않고 조사는 계속되었다.

이범영 소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되자 민청련 활동으로 초점이 옮겨갔다. 계속되는 구타와 협박 공갈 속에서 이을호는 뭔가를 계속 써야만 했다. 아마 민청련 활동에 대한 자술서를 쓴 걸로 추측되지만 이을호는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뭔가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글이면서 몹시 위험한 글을 썼던 것으로만 기억했다. 이때 이미 이을호의 정신세계는 환각과 환청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을호는 뭔가를 쓰면서도 글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머리가 다 빠진 올빼미가 되어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각 속에 빠져들었다.

2박 3일간의 안기부의 조사가 끝나고 이을호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으로 넘겨져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이을호가 남영동으로 넘어간 날인 9월 4일,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고 있던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에 이첩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남영동 대공수사단 5층 조사실에서 복도를 사이에 두고 김근태 의장과 이을호가 같은 조사를 20여일간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김근태 의장에게 엄청난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가해졌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을호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고문이 가해졌다.

이을호는 조사실에서 김근태 의장으로 추측되는 고문받는 신음소리를 들었는데, 이것은 이을호에게 또 다른 고문이었다. 이을호는 주로 물고문을 많이 받았는데, 첫날과 둘째날 고문이 집중되었다. 조사관들은 이을호의 진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조로 끌고가 물고문을 가했고, 그런 다음에 조사를 계속했다.

계속되는 고문과 겁박 속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는 이을호의 정신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렁이도 되고 뱀도 되며, 닭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등의 계속적인 동물 환각 속에 있었다"고 했다. 물고문 탓에 몸도 망가졌다. "머리를 물에 처박아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몇 번인지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나중에는 변도 안 나왔고 먹지도 못했다. 변을 한 번도 못 봤다"라고 증언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 고문 장면
ⓒ 저작권 없음
CNP론이란?

두 사람에 대한 남영동에서의 조사는 민청련의 이적성을 조작하는데 집중되었다. 이 조작에 동원된 것이 이른바 CNP론이다. CNP란 CDR(시민민주혁명론), NDR(민족민주혁명론), PDR(민중민주혁명론)의 머리 글자를 딴 조어인데, 이중에서 민청련의 지도노선이 NDR이고, 이것은 북한이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과 같다는 것이 남영동 고문자들의 주장이었다.

NDR은 민청련 상임위 정책실장이었던 이을호가 김근태의 생각을 정리하여 정립한 것이고, 이것을 김근태 의장이 민청련 회원수련회에서 회원들에게 설명하고 민청련 지도노선으로 확정했다는 것이었다. 이 조작된 도식을 인정하는 진술을 받기 위해 두 사람에게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이 가해졌던 것이다.

여기에 민청련 사건 직전에 있었던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으로 구속된 문용식의 강요된 진술도 덧붙여졌다. 민추위라는 지하 전위조직의 리더 문용식이 민추위의 지도노선으로 NDR을 채택했는데, 이것은 문용식이 민청련 정책실원으로 있을 때 이을호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라고 조작하였다. 문용식에게도 엄청난 고문과 협박이 가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팩트는 이랬다. 1985년 들어 재야운동권의 양대 축이었던 민주통일국민회의(의장 문익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공동의장 이부영, 김승훈)의 통합이 제기되었는데 그 과정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 원인에 대해서 김근태 의장이 운동권의 경향성을 세 갈래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그것이 CD(시민민주주의), ND(민족민주주의), PD(민중민주주의)였다. CD와 PD가 한편에 편향된 것이라면 ND가 좀더 통합적인 입장이라는 주장이었고, 이것이 민청련이 통합논쟁에서 견지해온 입장이었다. 이것을 민청련 수련회 모임에서 김근태 의장이 칠판에 CD, ND, PD를 써놓고 회원들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CNP론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이을호가 받은 정신적 상처는 일생 동안 지울 수 없는 큰 흔적을 남겼다. 조사관들은 끊임없는 고문과 회유, 겁박 속에서 이을호에게 CNP혁명론을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그에 맞춰 자술서를 쓰게 했으며, 신문조서를 작성했다. 때로는 김근태 의장의 조서와 문용식의 자술서를 들이밀면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인정의 강도를 높여갔다.

D(민족민주주의)에 R을 붙여 NDR(민족민주혁명론)을 인정하도록 했고, "폭력혁명이라는 말을 넣어라", "좀 글이 논리적이니까 감정을 넣어라" 등 계속해서 강도를 높여 글을 쓰도록 했다. 여기에 대꾸라도 하면 무자비한 고문이 뒤따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북한 혁명노선에 동조하는 이을호의, 나아가서 민청련의 폭력혁명노선이 완성된 것이다.
 이을호와 김근태 석방을 요구한 성명서
ⓒ 민청련동지회
민청련과 가족의 항의투쟁

이러한 지옥 같은 과정 속에서 이을호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고문과 겁박으로 출발한 조사 첫날부터 착란 증세를 보여 온갖 동물의 환각이 나타났고, 수사관에게 그 고통을 호소했지만 철저히 무시되었다. 점차 시간의 흐름도 의식 속에서 사라졌고, 환각과 환청의 세계로 넘어가 버리면서 자신을 옭아맬 진술서의 신문조서 쓰는 것조차도 사소한 일로 여겨졌다.

검찰로 송치될 무렵에는 예수, 부처, 백두산 신령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이을호가 성장하면서 추구해왔던 인류 구원, 중생 구원, 우주 구원의 서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환상들은 어쩌면 지옥 같은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한 본능적인 자구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김근태, 이을호가 연행되자 9월 5일 민청련에서는 '불법 연행된 김근태, 이을호와 구속된 김병곤을 즉각 석방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3일간 민청련 사무실에서 연행, 구속자 가족과 회원들 중심으로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김근태와 이을호의 부인 인재근과 최정순은 처음에는 남편들이 어디로 잡혀가 어떤 조사를 받고 있는지 몰라 종적을 찾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러다가 대략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있는 것으로 파악은 했지만 면회를 할 수 없으니 어디서 어떤 상태로 있는지를 알 수가 없어 마음을 졸였다. 그래서 이들은 구속 기한인 20일이 지나면 검찰로 송치돼야 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검찰청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9월 24일부터 검찰청 조사실로 가는 길목인 5층 엘리베이터 앞을 하염없이 지켰다.

예상은 적중했다. 9월 26일 인재근은 지하 호송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5층으로 올라와 검사실로 가는 김근태 의장을 극적으로 만났다. 여기에서 4층에 있는 담당검사실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김근태로부터 인재근은 고문받은 시간과 횟수, 온갖 고문의 실상을 들었고, 이것을 그날 바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목요기도회에 달려가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민청련 사무실에서 회원들과 수감자 가족, 재야인사 등 30여명이 '치안본부의 살인적 고문수사를 규탄한다 –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의장 김근태씨와 상임위 부위원장 이을호씨에 대한 고문수사를 폭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고문수사와 구속을 규탄하는 항의농성을 시작했다.

항의농성에도 불구하고 민청련에 대한 탄압은 더 확대되어 10월 초에 청년부장 김종복과 대변인 김희상, 최민화 부의장, 권형택 사회부장,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 등이 차례로 구속되고, 김희택 부의장과 이범영 집행국장 등 7명의 간부가 수배됐다.
 2007년 6월 인재근 최정순과 함께 한 이을호
ⓒ 민청련동지회
정신질환 발작

이 무렵 최정순은 안왕선 검사실에서 연락을 받고 검사실에서 이을호를 가까스로 면회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혹독한 고문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을호는 "밥도 한끼 못먹고 배설을 한번도 못하여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정신적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날더러 북에 갔다왔다고 협박한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검찰로 송치된 이후에도 "밤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몸을 지탱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최정순은 이을호의 말과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온 몸에 기가 안 통한다", "잠을 못 잔다"는 이을호의 말을 듣고 이을호의 병력을 알고 있는 최정순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0월 7, 8일경에도 최정순은 검사실에서 이을호를 만났는데 여기에서도 이을호는 "죽은 아버지가 나를 징역 살린다. 형(85년 5월 29일 사망함)이 죽은 것이 내 책임인 것 같다. 김대중의 하수인이 치안본부에 있는데 그가 나를 징역 살린다"고 하여 최정순을 놀라게 했다.

최정순의 불안은 현실로 드러났다. 1985년 10월 11일 검찰조사 과정에서 이을호가 "목이 이상하다. 쉬어야겠다. 나는 내 상태를 잘 안다"고 하면서 "몸에서 진땀이 나고 조사를 더 이상 받을 수 없으니 의사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으나 묵살되었다.

그날 저녁부터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날 12일에는 본격적으로 발작증세가 나타났다. 구치소 감방 안에서 발을 구르고, 창에 매달려 창틀을 잡아 흔들었으며, 옷을 찢어버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간수들이 쫓아와 말려봤지만 소용없었고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구치소측으로부터 발작 소식을 들은 최정순은 안왕선 담당검사를 찾아가서 이을호의 발작과 그간의 정신병력, 그리고 현재의 심각한 상태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시급하게 병원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최정순의 요청이 다행히 받아들여져 그날 10월 15일 오후 9시 이을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으로 옮겨져 8주간의 감정유치 처분을 받고 입원했다. 시립정신병원 정신과장 안창호는 "증세가 심각하다. 감정이 끝나면 3, 4개월 입원해야 하고, 2, 3년 동안은 치료해야 완치가 가능하다. 잘못하면 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10월 17일에는 최정순이 목요기도회에서 이을호의 발작 소식을 알리고 '정신이상이 되게까지 한 치안본부의 수사를 고발한다'는 제목의 호소문을 눈물로 낭독하고, 조속한 치료와 석방을 위해 힘써 줄 것을 호소했다.

10월 22일에는 최정순이 서울시립병원에서 20여분 간 이을호와 면담했다. 이을호는 "춥고 배고프다. 사람 취급을 안 한다. 잠도 맨바닥 구석에 처박아 재우고 그래서 여기서는 못 살겠다. 구치소는 천국이다. CNP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법정에 가서 CNP의 내용을 떳떳이 밝혀내야 한다"는 등 횡설수설하며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최정순은 담당검사를 찾아가 환자 치료를 위해 병원이나 병동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시설이 나은 국립정신병원으로 옮겨줄 것, 감정기간을 단축시켜 치료를 빨리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검사에게 제출했다. 11월 23일에는 이을호를 국립정신병원으로 옮기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번에도 최정순의 간절한 탄원서가 주효했다.

이듬해 3월에는 최정순이 이을호의 석방과 치료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검찰과 각계 인사들에게 보냈다. 아울러 민가협을 본부로 하여 이을호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최정순은 둘째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을 한 달쯤 앞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남편을 석방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최정순의 호소가 추기경을 움직여서 최정순이 둘째 아이 딸 준아를 낳는 날인 4월 30일, 안기부 요원들이 미역을 사들려서 이을호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이을호는 병이 깊어 있었다. 예쁜 딸을 보고서도 아무 표정도 없고 목석처럼 반응이 없었다. 11시쯤 데려와서 오후 3시쯤 데리고 갔다. 그 다음 날도 또 데리고 와서 아기 한번 안아보게 하고 다시 데려갔다.

완전 석방이 안 되어 애를 태우던 중 최정순은 6월 5일 새벽에 미국에서 인권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심기섭씨(미국에서 인권운동하는 교포로 김근태 의장과 친분이 있어 민청련 구속자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늘 석방되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혹시 미국의 힘이 작용한 것일까, 마침내 이을호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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