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스퇴츠너의 글과 사진으로 본 제주 자연과 문화 (3편)
찍과 이녁만씩

해녀들이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감태다. 감태를 태워 '감태재'를 팔았다. 감태를 태울 때는 조심해야 한다. 감태 연기가 매우 독해서 주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제주 해안가에 '감태막'이 많았다. 감태 수집상들이 '감태막'에서 수집한 '감태재'를 일본·국방성에 납품하였다. 일본은 '감태재'에서 '요오드'(아이오딘 iodine) 성분을 뽑아내어 폭탄을 제조했다.(1941년 미국이 주도한 ABCD 포위망으로 무역봉쇄를 당한 일본은 석유 및 폭탄재료로서 중요한 것은 갈륨(K)인데 유럽에서 질산칼륨(KNO3)의 수입이 막히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식민지 제주에서 감태를, 동남아에서 야자수 등을 수집하여 추출한 요오드칼륨(KI)으로 질산칼륨(KNO3)을 대체하였다. 또한 석유 대신 에탄올을 연료로 사용했는데, 이를 위해 제주도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주정공장을 건설하여 대량의 에탄올을 생산했다.)
미역은 '이녁만씩' 차지하고, 톳은 '찍'으로 나눈다. 미역은 능력껏 채집해서 자기만씩 가져가고, 톳은 공동으로 작업해서 1/n로 몫을 나눈다는 말이다. 해산물 채집이 어렵고 값이 나갈수록 '이녁만씩' 차지하고, 반대의 경우 '찍'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바다와 마을의 사정에 따라 '찍'과 '이녁만씩'의 대상이 달라지기도 한다.(사례1: 1970년대 경남 기장에서 미역양식이 성공하면서 제주 미역의 전성시대가 막을 내린다. 미역 값이 하락하면서 미역은 제주 해녀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980년대 '독고달'과 '고장풀'을 일본으로 수출하게 되면서 귀했던 미역은 검질(잡초)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시장 변화에 따라 '찍'과 '이녁만씩'의 대상은 달라지게 되고, '이녁만씩'에 따르는 경쟁관계가 느슨하게 된다. 사례2: 2018년 조사에 의하면, 조천 중동 해녀회는 톳을 '찍'으로 나누고, 조천 하동 해녀회는 톳을 '이녁만씩' 차지한다. 톳 분배에 있어서 중동 해녀회는 일반적이고, 하동 해녀회는 특수하다. 중동에 비해 하동 해녀회의 평균 연령이 높고, 회원 수가 4인으로 매우 적다. 신입회원이 끊긴 하동 해녀회의 미래는 해체 수순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하동 톳 분배의 특수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스퇴츠너의 글에 따르면 해녀들이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감태다. 그 당시 감태는 미역만큼이나 주요한 품목이었다. 감태는 깊은 수심에서 자라기에 채집 또한 수월치 않다. 하지만 '이녁만씩' 차지하지 않고 공동으로 작업하고 있다. 특수한 상황으로 보인다.


까끄레기낭
큰 상어들 때문에 해녀들은 항상 함께 수영하고 잠수한다. -발터 스퇴츠너
제주 해녀공동체의 부조 문화는 다양하다. 매년 2월 영등제를 올린다. 공동으로 바다 검질을 멘다. 회원들 대소사를 챙긴다. 이는 공동체를 위함이다. '할망바다'를 정하여 일반 해녀의 물질을 금한다. 미역 금채기(禁採期)에도 '애기ᄌᆞᆷ수'에게는 미역조문(미역채취)을 허락한다. 이는 약자 보호를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은 바다가 공공재라는 규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부조 이상의 결속을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다가 규범이 아니라 대자연이라는 엄혹한 현실에서 오는 것이다. 바다는 시시각각 바뀐다. 혼자서는 감당치 못할 위험이 도사린다. 바다라는 일터 자체가 목숨을 위협하는 큰 상어다. 서로 벗이 되어 의지해야 한다.
마을마다 바닷가 갯바위에는 '할망당'이 하나씩 있다. 갯바위 틈에 짠물을 머금은 '까끄레기낭'('사스레피 나무'의 제주어, '가스레기낭'이라고도 부른다.)이 있고, 나뭇가지에는 '물색'이 걸려 있다. '망사리'에 '요망진'(제주 어른들은 똑부러지고 당찬 아이를 보고 '요망지다'라고 표현한다.) 것들을 가득 채워달라는 '비념'으로 걸어 놓은 것일까? 몸뚱이 하나로 물질을 해야 하는 해녀에게 '비념'이란 어떤 것일까? 자신을 위한 '비념'이 서로를 위한 '비념'이 되고, 서로를 위한 '비념'이 바다를 위한 '비념'이 되는 것일까?
제주 해녀는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을 지키며 강한 결속을 부드러운 공존으로 품어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많은 파고를 넘기며 제주 해녀공동체의 오랜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저 달이 지도록 놀당 갑서

스퇴츠너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물살레'(살레'는 부엌에 그릇을 보관하는 장을 말한다. '그물살레'는 그물을 보관하는 장을 말한다.)다. 스퇴츠너의 묘사는 매우 정확하다. 다만 네 개의 기둥에 기름칠을 하여 쥐가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했다는 사실이 추가됐다면 더없이 정확했을 것이다. 쥐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 생선 살이 묻은 그물을 뜯어 먹기 때문이다.
'그물살레'에 보관된 그물은 그 길이가 기본 200m가 넘는다. 이 거대한 그물을 사용하여 멸치를 잡았는데, 이를 '후릿그물'이라 부른다. 1902년 부산에 그물공장이 생기면서 제주 '후릿그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광민,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2004년, 대원사, 209p)
'후릿그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당선(지휘하는 배)이 멸치를 발견하고 신호를 보면 망선(그물배)이 출동한다. 두 대의 망선이 그물을 펼쳐 멸치를 포위한다. 망선은 그물 밑자락이 해저 바닥에 닿을 때까지 수심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그물이 바닥에 완전히 닿아 멸치가 도망갈 구멍이 없을 때 그물의 포위망을 좁힌다. 이를 '장막후림'이라 한다. 작은 배가 '장막후림' 안으로 들어가 멸치를 '족바지'(고기를 거리기 위한 도구로 손잡이가 달린 그물이다.)로 거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안지형의 상태다. 해안이 돌투성이인 곳에선 그물이 찢어지기 때문에 '후릿그물'이 불가능하다. '후릿그물'은 해안이 '모래바닥'인 곳에서만 펼칠 수 있는 어로 기술이다.
함덕해수욕장을 '큰바닥', '샛바닥', '족은바닥'이라 불렀고, 하모리해수욕장을 '후릿바닥'이라 불렀다. 과거에 마을의 풍요를 가져다준 '모래바닥'이 지금은 '모래사장'이 되어 피서객을 맞이하고 있다.
다음은 함덕에 전승되는 '멜 퍼낼 때 부르는 소리'의 일부다.
놀당 갑서 자당 갑서
달도 좋고 날도 좋다
관콧에서 놀던 님도
샛바닥에서 놀던 님도
올레코지에서 놀던 님도
큰바닥에서 놀던 님도
말둥이동산에서 놀던 님도
서모코지에서 놀던 님도
다려모루에서 놀던 님도
오늘일랑 다덜 모영
먹고씨고 먹고씨고
저 달이 지도록 놀당 갑서
검석속립(劍石束立)

스퇴츠너의 말처럼 사진 속 배의 절반이 뗏목이다. 제주에서는 이를 '테우'라 부른다. 나무를 엮어 만든, 말 그대로 뗏목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약마희'(躍馬戱)가 기록되어 있다. '약마희'를 과거엔 영등제의 행사로 '테우에 말머리 장식을 하여 노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요즘은 영등제 때 '테우를 타고 경주하며 노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일제강점기 때 북촌에서 시행되었으며, 경주가 끝나면 장원(壯元)을 뽑는다고 기술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jeju.grandculture.net/jeju/toc/GC00700657)
북촌은 인근 마을 중 해녀와 '테우'가 제일 많은 마을이었다. 해녀가 많은 것은 북촌 앞바다에 '다려도'라는 풍부한 어장이 있기 때문이고, '테우'가 많은 것은 해녀를 '다려도'까지 이동시키는 배, '테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테우' 하나에 해녀 넷이 붙어서 간다. 해녀 넷이 채집한 해조류를 '테우'에 싣고 나면 배가 기우뚱할 정도이다. 하여 '테우' 하나에 네 명 이상은 어렵다. 1998년 북촌 해녀의 수는 200여 명이었다.(제주도해녀유산총서Ⅰ, 제주특별자치도 해녀유산과, 2019, 153p) 일제강점기 때 북촌 해녀의 수를 200명으로 잡아 본다면, 영등날 장원을 먹기 위해 '다려도'를 향해 일제히 노를 저었던 '테우'의 수를 가늠할 수 있다.


방조(防潮) 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수심 깊은 곳에 방파제를 만들어 밀물, 썰물에 상관없이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과거 '튼석' 마련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제주 특유의 해저지형 때문이다. 자연적 방조물이 있는 곳엔 수심이 낮고, 수심 깊은 곳엔 파도를 막아줄 방조물이 드물다. 행원, 김녕, 조천, 화북, 애월은 조선시대 제주의 5대 포구였다. 자연적 방조물과 깊은 수심이 확보된 포구로서 하늘이 허락한 곳이다.
1702년 제주에 부임한 목사 이형상은 자신의 책, 『남환박물』에 '검석속립'(劍石束立)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제주 해안을 둘러싼 검은 현무암을 보고 '검처럼 날카로운 바위가 묶인 듯 서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제주는 화산섬이다. 여기저기서 분출한 용암이 바다로 흘러내려 제주 해안을 '검석속립'으로 만들었다. 이형상은 이러한 제주 해안을 보고 배 댈 곳이 귀하다고 한탄한 것이다. 하지만 바다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제주 백성에게 '검석속립'은 무엇이었을까?
포구를 만들어야 하는 제주인에게 '검석속립'은 피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군선(軍船), 관선(官船) 등 큰 배의 입출항을 걱정했던 이형상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적게는 2~3개, 많게는 5~6개의 크고 작은 포구를 만들어 냈다. 또한 포구 사정에 적당한 크기의 배를 만들어 생애를 이어갔다. 이 모두가 '검석속립'을 활용한 결과였다. '후릿그물터'인 모랫바닥이 마을의 풍요를 가져다주었다고 전술하였다. 하지만 해녀에게 모랫바닥은 불모지일 뿐이다. 해녀에게 보물을 안겨 준 것도 '검석속립'이었다.

그러나 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다를 잊지 말아야 한다. 조용한 해안과 탁 트인 바다, 하얀 모래사장과 어두운 절벽, 크고 작은 수천 개의 바위섬, 깊고 푸른 바다가 광활함을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 발터 스퇴츠너.
글쓴이 고승욱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5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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