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교통, 과학 그리고 무덤...대전이란 도시의 정체성
[임재근]
활기를 찾은 대전의 원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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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원도심 은행동에 위치한 성심당 케이크와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이다 |
| ⓒ 임재근 |
골령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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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곤룡로’에 벚꽃이 만개한 2024년 4월의 모습 왼쪽으로 보이는 공터가 산내 골령골의 여러 학살지 중에서 1학살지이다. 산내 골령골은 1학살지부터 8학살지까지 골짜기를 따라 1km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고 해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 ⓒ 임재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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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여름, 학살 직후 산내 골령골의 모습 오른쪽으로 좁은 길이 보인다. 이 길은 충북 옥천군 군북 사람들이 대전으로 장을 보러 갈 때 오가던 길이었다. 길옆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이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부근에서 앞쪽으로 흙이 파헤쳐진 후 덮어진 흔적을 볼 수 있다. 이곳이 골령골에서 2학살지에 해당한다. 1학살지는 오른쪽 산 아래 부근이다. 이 사진은 골령골 학살 사건 직후 현장을 취재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 ⓒ Alan Winnington |
필자가 처음으로 골령골에 가 봤던 2000년대 초반, 1학살지에는 밭이 있었다. 죽임당한 이들의 유해 위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것이다. 밭고랑 사이에서도 사람 뼈가 나올 정도로 처참하게 방치된 학살터였다. 죽여서는 안 되는 국민을 전쟁을 빌미로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천 명까지 학살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좁은 골짜기에서 어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전에 살면서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미안함과 부채감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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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령골 1학살지에 세워진 비석 이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2007년 7월이다. 비석 뒤로 경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보인다. 밭 일부가 학살당한 이들이 암매장된 긴 구덩이의 위치와 중첩되어 있고, 밭고랑 사이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되곤 했다. 1학살지에서는 2015년을 시작으로 2020~2022년에 걸쳐 대대적인 유해발굴을 해 1천구 이상의 유해를 수습했다 |
| ⓒ 임재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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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7월 초, 미군 애버트(Abbott) 소령에 의해 촬영된 골령골 학살 장면 이 사진을 통해 암매장지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사진 속 장소는 1학살지에 위치한 긴 구덩이의 일부이다. 유해발굴 과정에서 구덩이 속에 남아 있는 바위 3개를 통해 사진 속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유해를 발굴하면서 사건 당시의 모습과 같은 구덩이를 다시 파냈는데, 이때 발견한 바위와 함께 구덩이를 보존하기를 요청했으나, ‘안전’을 이유로 유해발굴이 끝난 후에 구덩이를 흙으로 다시 메웠다. 다행히(?) 구덩이 속 바위 3개는 그대로 땅 속에 묻혀 있다 |
| ⓒ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대전이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피해가 크고, 대표적 국가폭력 피해지역이 된 데에는 복합적 이유가 있다. 우선 당시 대전은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였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의 임시수도가 되어버렸다. "되어 버렸다"고 표현한 데에는 천도(遷都)의 과정에서 공식적인 조치도 없었고, 절차도 지켜지지 않은 채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란 온 이후 장관을 비롯한 국회의원 등 정부 요인들이 긴급히 대전으로 몰려들면서 '사실상 임시수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에 대전으로 피란 왔는데, 그때 묵었던 장소가 바로 충남도지사 공관이다. 이 때문에 당시 충남도지사 공관을 '대전 경무대'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도지사공관을 비롯해 주변 관사를 묶어 대전시는 '테미오래'라는 이름으로 문화복합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충남도청이 1932년에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도지사를 비롯해 고위 관료가 묵을 여러 채의 관사가 조성되면서 형성된 특별한 공간이다. 행정 관사촌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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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충남도지사 관사 한국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란 와서 이곳에서 묵으면서 ‘대전 경무대’라 불리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란 온 다음 날부터 대전 지역 민간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
| ⓒ 임재근 |
일제는 대전을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분기하는 교통중심지로 형성해 나갔다. 철도 교통의 편리성을 이유로 일제는 1919년에 대전에 정치범 수감시설 성격을 띤 감옥을 신설했다. 대전 감옥은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이 끌려왔던 공간이기도 하다.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드(Bob E, Edwards) 중령이 1950년 9월 23일 자로 작성한 '한국에서 정치범 처형(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대전에서의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정치범'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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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형무소 터에 남겨진 우물 하나(오른쪽)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인민군에 의한 우익 학살을 규탄하려는 목적으로 남겨놓았다. 우물 왼쪽으로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이 세워졌다. 그러면서 대전형무소 터는 한동안 반공교육의 상징지로만 활용되었다 |
| ⓒ 임재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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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의 나무 왕버들 1919년에 신설된 대전 감옥은 도심이 확장되면서 1984년에 외곽으로 이전했다. 대전형무소의 역사성을 알았던 마을 사람들은 그 터에 덩그러니 남겨진 왕버들 나무에 의미를 부여해 ‘평화의 나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이 다시는 재발되지 않고,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함께 시를 만들었다 |
| ⓒ 임재근 |
1984년에 대전교도소를 외곽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대부분 지역을 민간에 매각해 대규모 아파트와 상업 시설이 들어섰는데, 매각하지 않고 국가에서 보유하던 잔여 공간을 반공교육의 상징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곳엔 충남반공종합교육회관(현 자유회관)이 들어서고,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이 세워졌다. 감옥 시설 대부분을 철거했지만, 망루와 우물을 각각 1개씩 남겨두었다. 그중 우물을 남겨둔 이유는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 즉 인민군에 의한 학살을 부각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산내 골령골'은 대전형무소 터에서 한동안 금기의 단어였다. 그러다가 2010년 마을역사탐험대 활동을 통해 옛 형무소 터에 남아 있던 왕버들 나무에 의미를 부여해 '평화의 나무'로 명명하며 지은 시에서 처음으로 '산내 골령골'이 등장했고, 그후로 다시 10년 후 역사공원화 공사를 통해 전시물이 종합적으로 마련되면서 대전형무소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편향된 기억과 기록이 조금씩 균형을 잡기 시작했고, 대전형무소의 역사성도 다층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말할 때, '교통의 도시'라 말하는 경우가 있다. 국토의 중간에 자리하고, 철도뿐 아니라 도로 교통망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필자 또한 대전에 살면서 교통이 참 편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대전은 과학기술도시의 정체성도 지니고 있다. 1970년대 대덕연구단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연구기관과 과학기술 인재가 대전으로 몰려들었다. 또, 최근에는 '밀가루 도시' 또는 '빵의 도시'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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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대전 시가지의 모습 이 사진은 AP통신의 제임스 프링글(James Pringle)이 1950년 9월 30일에 당시 대전시청사 옥상에서 찍었다. 전면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산이 대전에서 가장 높은 식장산이다. 파괴된 도심은 현재 은행동 일대이다 |
| ⓒ AP |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는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당시 가해 부대 책임자들이 장군까지 진급했다는 이유로 국립묘지법에 따라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데 비해,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수십 년 동안 골령골 골짜기에 암매장되어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하게 한다. 왜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는커녕 국민의 생명을 불법적으로 학살했을까? 왜 우리의 역사는 국가에 의한 전쟁범죄를 외면해 왔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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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현충원 전경 현충원 너머로 대전 도심이 보인다. 대전 도심 너머 대전현충원과 반대 방향으로 산내 골령골이 있다. 대전에는 ‘국가를 위한 죽음’의 상징지와 ‘국가에 의한 죽음’의 상징지가 상반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
| ⓒ 임재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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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은 우리 삶의 터전을 처절하게 파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 전쟁으로 파괴된 1950년 9월의 도심 사진 조각과 전후 복구 작업 후 재건되어 일상을 즐기고 있는 2015년의 사진 조각을 반복·연결해 편집했다 |
| ⓒ 임재근 |
하지만 민간인 학살과 같은 국가폭력에 의한 상처는 지우고 외면한다고 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폭력과 연관된 장소를 찾아가며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상처를 드러내 놓고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슬픔에 함께 울어줄 때 치유 가능성은 커진다.
필자가 '교통의 도시', '과학기술 도시', '빵과 밀가루의 도시' 등 복합적 정체성에 덧붙여 '죽음'과 '무덤'을 말하는 이유는 '죽음'과 '무덤'의 정체성을 넘어, 대전이 '평화'와 '인권'의 도시도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내 골령골을 비롯해 국가 폭력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고, 평화가 파괴된 곳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산내 골령골을 찾는 이들이 많아져 골짜기가 북적이고, 전시관에 들어서기 위해 줄 선 모습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재근은 (사)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고, 공주대학교와 목원대학교에서 북한 및 한반도 평화와 통일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다.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교수와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살아있는 근현대교과서-국립대전현충원》(봄인터렉티브미디어, 2022, 공저), 《철도, 대전의 근대를 열다》(대전동구문화원, 2023, 공저),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문화의힘, 2024, 공저)가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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