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스퇴츠너의 글과 사진으로 본 제주 자연과 문화 (2편)

고승욱 2025. 6. 2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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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등짝 사이에 꽃게 한 마리

마치 세속 이전의 거대한 거북 무리가 잠든 듯 평평한 아치형 지붕이 산 사이에 나란히 놓여 있다. - 발터 스퇴츠너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92

스퇴츠너는 강연 때마다 한반도의 초가지붕을 거론하며 감탄했다. 제주 체류 때도 제주의 초가 풍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스퇴트너의 사진 속에 초가지붕 사이로 기와가 보인다. 마치 거북이 등짝 사이에 꽃게 한 마리가 있는 듯하다. 대문을 기와로 올렸으니 부잣집이라 해야겠다.(1904년 기록인 『삼군호구가간총책』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 가호 총 51,355호 중 기와집은 237호로 전체의 약 5% 정도이다. (참조) 조성윤, 「조선시대 제주도 인구의 변화추이⌟, 탐라문화 제26호, 67p) 도요(陶窯)가 없었던 제주에 기와는 귀한 것이었다. 제주에서는 도요(가마)를 '굴'이라 한다. 제주에 '굴'이 일반화되어 기와와 옹기가 보급된 시기를 18세기쯤으로 본다.(이경효, 「조선시대 제주도 옹기연구⌟, 2010) 그 이전에는 관덕정을 제외한 나머지 관청도 초가집이었다. '물허벅'도 나무로 만들었다.(물허벅: 물을 담아 나르는 옹기를 말한다. 옹기가 일반화되기 이전에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사용했다. 과거 문헌에서는 이를 목통(木桶)이라 표기하고 있다.)

옹기 제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흙과 나무다. 먼저 나무를 보자. 한라산에 올라가 대량의 나무를 구하긴 어렵다. 하여 옹기를 굽는 '굴'은 땔감 수급이 손쉬운 곶자왈 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다음은 흙을 검토해 보자. 

'뜬땅'과 '된땅'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86~87

제주도 토양은 '뜬땅'(화산회토)과 '된땅'(비화산회토)으로 구분한다. 제주의 총 경지 면적 중 '뜬땅'과 '된땅'의 비율은 7:3이다. '된땅'의 토양 중 점토 함량이 높은 흙을 이용하여 옹기를 만들었다. 스퇴츠너는 옹기 만드는 마을을 방문했던 것 같다. 토굴처럼 보이는 것이 옹기를 굽는 '굴'이다.

옹기 제작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1톤 트럭으로 흙 5대, 땔감 30대가 필요하고, 동원 인력만 100여 명에 이른다. 잘되면 흥하고, 못되면 망하는 일이다. '굴'에 불을 때기 전 모두가 수신하여 엄숙히 '굴제'를 올려야 한다. 
사진: 유용예-'굴제'를 올리는 모습. '굴할망', '굴하르방', '토신', '선대 굴대장'을 모시고 '굴제'를 올린다. '굴제'를 올릴 때는 다른 사람 입회 없이 '굴대장'이 혼자 엄숙히 '제'를 올린다.(인용: 구억리 그릇이야기, 구억리 마을회,2020) 
제주 모 집안 유산목록에 '깨진 팽'(깨진 병)이 기록되어 있다. 옹기는 귀할 뿐 아니라 생활의 필수품이라는 뜻이다. 제주의 옹기 수요는 지속적이었으며 그에 응하여 제주 '굴'의 수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굴'의 분포는 북서쪽에 편중되어 있다. 옹기 제작의 필수조건인 '된땅'과 '곶자왈'이 겹치는 곳이다. 
제주 땅은 동과 서가 다르고, 마을마다 다르고, 길 건너서 다르고, 내 밭에서도 다르다. 
'뜬땅'에 비하여 '된땅'은 논농사에 적합한 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주의 전체 경작지 중 논농사 비율은 겨우 0.5%에 불과하다.(고광민, 제주 생활사, 한그루, 2016, 274p) '된땅'이라 해도 토심(土深)이 얕고, 자갈 함량 높다. 따라서 토양의 투수성(透水性)이 높아 물을 머금기 어렵다. 투수율이 낮은 토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면적이 협소하고 분포는 일정치 않아 큰 규모의 저수지 조성이 어렵다. 화산섬 제주는 토양의 부박함과 다양성으로 인해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곳이 아니면 논농사가 어려웠다.  
제주도 토양 분포도(출처-제주도세계유산본부, 헤드라인 제주) 한반도의 토양통은 대략 400통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제주도는 현재 70통으로 확인되었다. 전라도의 토양이 6통인 것에 비하면 제주 토양은 매우 다양하다 할 수 있다. 제주도는 한반도 면적의 1.8%인 반면, 제주도 토양의 종류는 한반도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다. 이 또한 제주도 토양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나록쌀이 물 지랴, 산듸쌀이 낭 지랴                                                                       (나록쌀, 산듸쌀은 부자들이나 먹는 것인데, 부자들이 힘든 일을 하겠느냐)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73~74

스퇴츠너의 사진 속에는 '모내기' 장면이 있고, '섶섬'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사진 속의 장소는 서귀포 '소정방'과 '정방폭포' 위쪽 지대로 추정된다. 선인들은 이곳을 '정무시'라 불렀다. '정무시'는 예부터 논농사로 이름난 곳이다. 사시사철 이곳을 흐르는 물이 '소정방'과 '정방폭포'의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정무시'는 빗물에 의지하는 '강답'과 달리, 흐르는 물에 의지하는 '골답'이다. 제주도 0.5%의 논농사 지대 중에서도 귀한 곳이다. 스퇴츠너는 24절기 중 한 절기인 '망종' 때, '정무시'를 방문하였다. 매우 희소한 확률로 찍은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새벡에 듬북 혼 짐 해사 조반 먹나
(새벽에 바다로 나가 듬북 한 짐을 해와야 아침밥 먹는다)

이곳에는 가축에서 나오지 않은 거름 더미들이 있다. 매번 폭풍이 지나면 해변에 거대한 양의 해조류가 쌓인다. 이 해조류를 이렇게 더미로 쌓고, 그 위에 짚으로 그늘을 만들어 부패할 때까지 둔다. 그런 다음 이것을 거름을 사용하면 축산 거름만큼이나 농작물에 효과적이다. -발터 스퇴츠너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82

"논농사는 물로 하고, 밭농사는 거름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밭을 갈아 생계를 유지했던 제주 사람에게 거름은 생명줄이었다. 과거 집집마다 있었던 '통시'(돼지우리)는 '돗거름'(돼지의 똥,오줌에 보릿짚이나 잡풀 등을 섞어 오랫동안 절이고 삭혀서 만든 거름) 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돗거름'을 모아도 필요한 거름의 절반을 채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등교하기 전 들판에서 소똥을 주워와야 했고, 밖에서 놀다가도 오줌은 반드시 집에서 눠야 했다. 이 모두가 모자란 거름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귀한 생명줄이 바다에 있었다. 제주 사람들은 파도에 떠밀려 온 해조류를 건져서 거름으로 사용했다. 이를 '풍조'라 불렀다. 거름으로 사용하는 풍조는 종류도 많고, 채집 방법도 다양하고,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도 다르다. 여기서는 통칭하여 '듬북'이라 부르자. 스퇴츠너의 글에서 '해조류'는 '듬북'이고, 사진은 '듬북'을 쌓아놓은 '듬북눌'을 촬영한 것이다. 스퇴츠너의 말대로 제주 사람들은 '듬북'을 쌓아 썩을 때까지 보관했다가 11월에 시작하는 보리농사 밑거름으로 사용하였다. 보리를 주식으로 삼는 제주 사람에게 '듬북'은 바다가 준 선물이었다. 
사진: 우근호, 1973년-남성들이 '터우'를 타고 '노랑쟁이'를 채취하고 있다. '노랑쟁이'도 거름으로 사용했다. 요즘 중국에서 제주로 밀려오는 '괭생이모자반'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지만, 과거엔 귀한 '풍조'였다. 어부들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다가도 '풍조'가 밀려오면 하던 일을 모두 접고 '풍조'를 건져야 했다. '풍조'는 공짜로 얻는 거름이기 때문이다. 
사진: 고광민, 1995년-파도에 밀려온 풍조를 건지고 있는 모습 
사진: 강동식, 1993년-갯가에 밀려온 '풍조'를 건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공젱이'를 바닷물에 드나들며 건져 올리는 방법도 있다. 이를 '올림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배매기'라 하여 썰물에 허리춤까지 물에 들어가 해조류를 비어내어 건져 올리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배매기'와 동일한 방법으로 해조류를 비어낸 후, 밀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어낸 해조류가 갯가로 밀려오면 건져 올리는 방법도 있다. 해조류를 이용한 거름이 긴요한 만큼 '풍조'를 얻기 위한 수단도 다양했다. ('올림이' 참조: 제주도해녀유산총서Ⅳ, 제주특별자치도 해녀유산과, 2023, 98p),('배매기' 참조 : 고광민, 제주생활사, 한그루, 2016, 341p)
바릇이 욤아사 고슬도 욤나
(바다 해산물의 잘 여물어야 육지 곡식도 잘 여문다)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61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92

아마존이 산림의 보고(寶庫)라면, 제주 바다는 해조류의 보고이다. 현무암의 절리와 다공성은 해조류가 뿌리를 내리기에 적합하고, 따뜻한 해수 온도는 해조류 성장에 적당하다.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제주 해안의 특징이다. 제주 해안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침강해안과 달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완만한 경사는 낮은 수심의 드넓은 용암지대를 형성하였고, 이는 해조류 번성의 너른 터전이 되었다. 열악한 토양의 원인이었던 화산섬의 용암이 해상에서 풍부한 생태계의 이룬 것이다.

스퇴츠너는 비께(두툽상어)와 독게(닭새우)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스퇴츠너가 방문한 시기는 비께와 독게가 짝을 짓고 산란하는 시기이다. 독게는 현무암 절리, 구멍마다 알을 낳고, 비깨는 풍성한 해조류 속에 숨어 새끼를 부화한다. 제주도는 비께와 독게의 산란지인 것이다. 

*독개를 양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 스퇴츠너이다. 스퇴츠너가 제주를 방문 할 당시 일제강점기여서 숙소에서 제공하는 일본 의상을 입었다. 

요즘 것들은 물질을 참 편하게 호여
(요즘 것들은 물질을 참 편하게 한다)

농가 담장 앞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때때로 거의 알몸으로 짚불 주위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여성들을 볼 수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40도에 가까운 기온이지만, 여성들은 너무 추워서 입술이 파래지고 불 옆에서 손을 녹여야 할 정도로 추워한다.
그들 앞 몇 걸음 거리에 이런 박들이 있고, 각각 안경이 달려 있다. 박 위에 안경이라니,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박들이 바로 불가사의한 여성에 대한 답이다. 그곳에 앉아있는 여성은 바로 해녀들이다. 현지에서는 그들을 그렇게 부른다. - 발터 스퇴츠너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65~66

사진 속의 '박'은 '태왁'이다. '태왁'은 해녀가 물질할 때 의지하는 부표다. 요즘은 물에 뜨는 스티로폼으로 만들지만, 과거엔 '박'의 속을 비워 사용했다. '태왁' 위에 얹어있는 것은 물안경이다. 과거 해녀들은 물안경을 '눈'이라 불렀다. '눈'의 유래는 1800년 초반으로 추정된다. 맨 눈으로 물질하던 해녀에게 '눈'은 천지개벽할 일이었다. 
고무 산업은 1920년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 고무의 편리성이 알려지면서 제주 해녀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녀가 '소살'(작살)을 이용하여 물고기 잡는 것을 '궤기무레'라고 부른다. 과거 '소살'에는 고무줄이 없었다. 맨손으로 '소살'을 쥐고 팔의 힘만으로 물고기를 쏘아 잡았다. 고무줄이 유입된 이후, '소살'에 고무줄이 부착된 것은 1941년의 일이다. '궤기무레'가 수월해진 것이다. 
해녀가 입는 옷을 '소중이'라 부른다.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뜨거운 여름에도 1시간 이상 물질이 어렵다. 1970년대에 '고무 옷'이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물질 시간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그 당시 '고무 옷' 허용을 두고 해녀들 사이에 논쟁이 많았다. '고무 옷' 때문에 피부병이 나더라, '고무 옷' 때문에 해산물이 다 죽더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무 옷'은 제주 해녀의 공통 복장이 되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눈', '고무줄 소살', '고무 옷'이 유행될 때마다, 늙은 해녀들이 했던 말이 있다. "요즘 것들은 물질을 참 편하게 호여"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변치 않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산소통 사용금지다. 이는 맨몸으로 물질하는 해녀의 자부심 때문만은 아니다. 해산물 남획을 금지하여 공동의 자산인 바다를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해녀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함이다. 자신을 길러준 바다에게 보내는 해녀의 애정이며 경의인 것이다. <글=고승욱, 3편에서 계속>

글쓴이 고승욱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5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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