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패전 후 80년 동안 '헌법정신' 구현한 마을

월간 옥이네 2025. 6. 24. 15:54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은 마을의 다른 상상 ③] 인구 5700명이 모두 주인인 일본 아치무라의 주민주도형 자치 실험

고령화는 심화하고, 젊은이는 떠나며, 마을은 비어갑니다. 요즈음 농촌 풍경입니다. 정말 피할 수 없는 흐름일까요? 여기 '읍면자치'를 통해 보다 나은 마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시도를 조명합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6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자말>

[월간 옥이네]

 일본 나가노현 시모나이군과 기후현 경계에 위치한 아치무라(阿智村).
ⓒ 월간 옥이네
"자치는 스스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헌법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80년을 걸어왔습니다."

아치무라(阿智村)는 나가노현 시모나이군과 기후현 경계에 위치한 인구 약 5700명 규모의 산촌 이다(한 해 예산은 약 77억엔 규모, 공무원은 82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의회 의원은 모두 12명이다. 56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으며 8개의 자치회가 활동 중). 이 작은 마을이 일본 전역의 주민자치 사례 중에서도 주목받는 이유는 자치를 '주민 스스로 주체 가 되는 구조'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심엔 이를 꾸준히 말하고 이끌어온 '사람'이 있다.

그중에서도 아치무라 자치 활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오카니와 카즈오 전 촌장이다. 4선 촌장을 역임한 그는 정책 마련과 집행 전 과정에서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구조를 마을에 뿌리내리는 데 힘 써왔다. 오카니와씨는 "자치는 주민이 지역과 생활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며 아치무라의 자치 철학과 구체적인 실천 사례를 소개했다.

그가 이러한 철학에 눈을 뜨고 실천하게 된 배경에는 50여 년간의 공직생활과 공무원노동조합 활동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노조 활동을 통해 자치체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학습하며 연구했던 경험은 주민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촌장으로서의 토대로 이어졌다. 그는 "공동학습을 통해 마을의 방향을 함께 설정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웠다"고 말한다.

에도시대부터 이어진 '공동체 자치'의 뿌리
 오카니와 카즈오 전 아치무라 촌장.
ⓒ 월간 옥이네
오카니와 전 촌장은 주민자치의 기원을 에도시대의 '무라(村, 촌)'에서 찾는다. 당시 무라는 물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물을 관리하는 신사를 통해 공동의 규범을 세웠다. 이러한 무라는 단순한 생활 단위를 넘어 '번(藩)'과 '막부'에 세금을 납부하며 공공의 책임을 지는 자치적 공동체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천황 중심의 중 앙집권 국가를 수립했고 기존의 '무라'는 '시·정·촌'이라는 지방자치단체로, '번'은 '현'으로 재편됐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에도시대의 무라를 바탕으로 유럽식 지방행정구조를 흉내낸 것"이라며 이 과정이 국 가 주도의 구조 개편이었음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그는 "공동체가 국가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정·촌은 국가가 만든 단위가 아닙니다. 원래 존재하던 공동체를 행정이 나중에 규정한 것일뿐입니다. 자치체는 본래 공동체 기반의 자치적 삶에서 출발한 것이죠."

하지만 '강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메이지유신은 이 자치 구조를 국가 체제의 하위 단위로 흡수·편입시켰다. 그 결과 시·정·촌은 주민이 스스로 지역을 운영하던 자연스러운 공동체 질서와는 달리, 중앙집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전용됐다. 애초부터 자치의 본래 의미가 왜곡된 채 국 가가 출발한 셈이다. 천왕제 중심의 국가를 위해 '희생과 봉사의 존재'로 규정된 시·정·촌은 결국 국가 권력의 도구로 악용됐다. 이러한 흐름은 패전까지 이어졌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패전 때까지 시·정·촌의 희생과 봉사를 요구하는 교육은 시·정·촌 행정이 직접 담당했다"며 당시 시·정·촌이 중앙정부의 전쟁 수행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반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 시기가 일본의 식민지 착취가 극심했던 시기였다고도 덧붙였다. "이 지역에 있는 댐 도 조선에서 강제로 동원된 노동자들이 건설한 것"이라는 게 오카니와 전 촌장의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성찰하기 위해 아치무라는 1985년 '비핵평화자치 단체선언'에 이어 2013년 '만주몽고개척평화기념관'을 개관한다. 식민지 침략과 동아시아 전쟁에 대한 반성과 평화를 다짐하는 공간으로, 지역 차원에서 식민주의와 전쟁 책임을 직시하고자 하는 시·정·촌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헌법 정신으로 만든 마을
 아치무라 온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관촌 중심에선 매일 아침 지역 농산물 가공품을 만날 수 있는 작은 시장이 열린다. 모두 이 지역 농민과 주민들이 판매자로 참여한다.
ⓒ 월간 옥이네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평화국가를 선언하며 헌법을 전면개정했다. '전쟁을 포기'하고 '중앙집권 국가에서 분권국가로 나아간다'는 게 그 핵심이었다. 여기서 '분권국가'란 지역의 문제는 개별 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결정하며, 이 자치체가 모여 중앙정부를 구성한다는 의미다.

이런 배경 속에 일본 헌법과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의 핵심과 본질을 분명히 규정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지방자치의 핵심 이념으로 '인권보장'과 '주민자치·단체자치'를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주권에 근거한 주민자치가 우선이며, 단체자치는 그것을 지원하는 틀"이라고 강조했다.

아치무라는 이러한 헌법 정신을 마을 운영 전반에 충실히 반영해왔다. 주민이 주체가 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행정과 의회, 주민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체계를 정비해온 것. 오카니와 전 촌장은 "우리 마을은 '주민 한 명 한 명의 인생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마을 만들기의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정보 공개, 주민 참여, 학습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 등 자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 제도들을 정착시켜 왔다.

그는 "헌법 대개혁 이후 80년, 우리 같은 시·정·촌은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꾸준히 활동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정치가 과연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시·정·촌의 역할과 의미가 크다"고 했다.

"예를 들어 국민 다수가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고 있음에도, 정부는 이를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 시·정·촌의 몫이며,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정보 공유와 학습, 주민자치의 토대
 아치무라 들판 풍경.
ⓒ 월간 옥이네
오카니와 전 촌장은 주민자치의 흐름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행정 주도형으로 지역 유지나 기관 중심의 자치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을 위한, 주민에 의한 자치다. 아치무라는 후자를 지향하며, 정책 형성과 집행 전 과정에서 주민의 기획·발언·실행참여를 원칙으로 삼는다. 주민을 마을 운영의 실질적 주체로 세우는 데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행정은 정보 공개를 확대하고 주민의 자율적 학습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왔다.

그중 하나가 연 4회 책자 형태로 제작되는 소식지다. 행정과 의회의 주요 활동 내용이 담긴 이 소식지는 모든 가정에 배달되며, 코로나19 이전에는 이를 기반으로 마을별 순회 설명회도 진행됐다.

예산 편성 과정 역시 주민 참여를 원칙으로 한다. 매년 가을에는 다음해 예산 편성을 위한 의견 수렴과 설명이, 2~3월에는 예산안에 대한 최종 설명과 조율이 이뤄진다. 결산 이후인 5월에는 자치회별로 결산 내역을 공유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아치무라가 '자치의 핵심'으로 여기는 주민 학습은 '위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된다. 주민 5명 이상이 모이면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으며, 행정은 이들에게 10만 엔의 활동비를 지원한다. 위원회는 마을 과제를 발굴하고 이를 학습·토론해 정책으로 제안할 수 있으며, 해당 과제가 실제 사업으로 채택될 경우 제안 주민이 실행 책임을 맡는 경우도 있다. 아치무라 전촌박물관 역시 이러한 주민 주도 위원회 활동을 통해 탄생한 대표 사례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주민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은 주민이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자치회와 부락에서 총회를 통해 의견을 모으고, 공민관을 거점으로 주민 학습이 이뤄지는 것도 모두 이러한 자치 철학에 기반한다. 공민관은 헌법 개정 직후 여성 참정권 보장 등을 위해 전국적으로 설치된 시민 교육 공간으로, 아치무라에서는 자치 실현의 중심 거점으로까지 기능이 확장됐다. 연 2회 열리는 '사회교육연구집회'에서는 지역 의제를 학습하고 토론하며 지금까지 50회 이상 진행되고 있다.

초고령화 속의 선택: 연대와 생존
 아치무라 온천 숙박시설이 밀집돼 있는 모습.
ⓒ 월간 옥이네
일본에서도 '소멸 가능 자치단체'라는 개념이 대두될 만큼, 초고령화와 인구감소는 시급한 과제다. 아치무라 역시 2050년까지 인구가 40%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며, 현재 초등학교 5개와 중학교 1개(아치무라의 초등학생은 329명, 중학생은 178명으로 전체 인구 규모(5719명)의 8.9%)를 유지할 뚜렷한 대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행정이 아닌 주민이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며 "작은 마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대와 협력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500개 무라 중 약 300개만 살아남을 것이라 봅니다. 그때 선택지는 작은 자치단체가 단독으로 존속할 것인지, 아니면 광역행정이나 합병의 길을 택할 것인지 두 가지일 텐데요. 저는 작은 자치체야말로 주민 커뮤니티가 살아있고, 참여의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초소형 마을이 늘어날수록, 이웃 마을과 연계해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일본 각지에서 '소멸 가능성'에 저항하며 연대하는 이들이 모이는 작은 자치단체 포럼 역시, 그 해법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사례다.

아치무라가 남긴 질문

아치무라의 주민자치는 단순한 지역 운영을 넘어 민주주의와 헌법 그리고 공동체의 의미를 되묻는다.

"정치는 국가만의 일이 아니다. 헌법을 지키는 것이 시·정·촌의 몫"이라는 오카니와 전 촌장의 말은 주민과 행정이 함께 만드는 마을의 가능성과 그 앞에 놓인 과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작은 자치체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절실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치무라는 오늘도 공동체의 언어로 답하고 있다.
아치무라에서 본 일본 농촌 교육자치
일본은 시·정·촌(市·町·村) 단위의 기초자치단체가 교육자치 권한을 갖는다. 무라(村, 촌) 단위에서도 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접 학교를 운영하는 등 지역 실정에 맞는 교육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는 구조인 것. 아치무라 역시 이러한 교육자치가 실현되고 있는 곳으로, 촌립초등학교 5곳과 촌립중학교 1곳이 운영 중이다. 작은 무라 단위의 학교 운영은 일본 교육자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예산 구조: '현 + 자치체' 공동 부담
· 교사의 급여는 '현(県)'에서 지급
· 학교 운영비 등 일반 예산은 무라 행정에서 집행
· 일반행정 예산의 상당수는 지방교부세로 충당

교육위원회 운영 방식
· 교육장은 단체장이 추천, 의회가 동의해 임명
· 과거 선거제였으나, 1960년대 이후 임명제로 변경
· 교육위원회 위원 4명은 교육장이 선출

교원 인사권 및 거주지
· 형식상 인사권은 자치체장에게 있으나, 실제로는 '현'에서 채용·배치
· 과거엔 마을에서 거주하는 교사가 대부분이었으나 현재 30~40%가량의 교사가 인근 이이다시에서 통근하는 것으로 추정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의 관계
· 법적으로는 교육행정이 독립된 구조
· 단체장이 교육장을 추천하는 구조로 인해 실질적 종속 관계
· 전후 초기의 '대등한 관계'에서 현재는 '협력해 문제 해결'하는 관계로 변화
월간 옥이네 96호
글 사진 박누리

▶이 기사가 실린 월간 옥이네 구입하기 https://smartstore.naver.com/monthlyoki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