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같은 시, 시 같은 인생

한준명 2025. 6. 2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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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영철 시 에세이 <시가 있는 산책>

[한준명 기자]

왜 시를 어렵다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는 어렵다. 정서와 관념이라는 추상의 세계를 함축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는 시는 때로는 뜬구름 잡는 말 같기도 하고, 뭔가 그럴 듯하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막연하기 그지 없다.

더구나 기법을 중시하는 현대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머리 아플 각오를 해야 한다. 대부분의 시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 속에서 이야기를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시는 관념과 정서를 시어로 정제해 놓은 것인데 그 안에 사연을 찾으려하니 애당초 난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공감하고 감동한다.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의 기본 정서가 드러나는 노래 가사는 그것을 듣는 청자의 삶 속에서 개별화된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과, 환희와 실망과 그리움과 애탐의 순간순간이 개별적인 사연 속에서 감동을 만들어낸다. 이야기가 노래를 듣는 이들의 삶으로 재창조되는 순간이다. 시의 모태가 노래이기에 시를 노래처럼 읽고 개별적 삶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감상한다면 좀 덜 어려워질 법도 하다.

길에서 길로, 길에서 시로
▲ 시가 있는 산책 길 위에서 만들어진 시적 사색의 여정이 담긴 시 에세이
ⓒ 문학바탕
저자 김영철은 파주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그곳의 산과 강과 들을 걸으며 자랐다.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인사동과 계동 골목을 걸었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다니면서 대학로 혜화동 길을 걸었다.

교수로 첫 부임했던 해군사관학교에서 걸었던 진주의 바닷가와 벚꽃거리, 대구대 재직시절의 문천지 둑방길, 명예교수로 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던 건국대에서 일감호를 산책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길 위에서 만들어 간 시적 여정이 사색으로 맺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윤동주, 〈새로운 길〉

윤동주가 걷던 길처럼 내가 걷던 둑방길에도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바람이 불었다. 그 길을 걸으며 꽃과 새를 사랑하는 자연의 감성을 키웠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시처럼 소박한 시심(詩心)과 영혼을 키웠던 것이다. 서정주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지만 나를 키운 건 8할이 길이었다. 둑방길은 '나의 길'이었고, '새로운 길'이었다.(<길에서 길을 묻다>(p.20))

이 책 <시가 있는 산책>(2025년 4월 출간)은 시 평론집이 아니어서 어렵지 않다. 살아온 시간들을 반추하며 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시와 연결해서 소개하는 '시 에세이'라 할 수 있다. 그 시들은 한국문학의 걸작인 경우도 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시인들의 작품에까지 망라되어 있다. 소개되는 시들은 동서양과 고전에 이르기까지 사뭇 방대하다. 더구나 작가의 삶과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순간순간 고개를 끄떡여가며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그 속에는 질곡의 한국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문인들의 낭만적 이야기가 가득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박인환, <세월이 가면>

1950년대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박인환의 시를 박인희가 1970년대에 불러 유명해졌던 <세월이 가면>이 그 당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선술집 '경상도집'에 모인 시인(박인환), 작곡가(이진섭), 가수(나애심)의 즉흥적인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처럼, 길에서 마주한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이 책의 곳곳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이 책에는 일평생 문학을 연구한 학자의 글답게 동서고금을 망라해서 철학자, 예술가, 문인들의 삶에 대해, 문학에 대해, 사물과 세계와 현상에 대해 언급한 경구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펜을 들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도 좋을 만하다.

산책하듯 읽는 시, 그 속에서 만나는 추억의 이야기

저자는 산과 강과 바다와 같은 자연을 기반으로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동식물들, 그리고 그 중 하나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함께 수많은 소재들을 추억처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그런 정서를 담은 시들을 소개한다. 산책하듯 시를 읽어가다 보면 독자의 삶 속에 수놓아진 개별적 추억들과 만나 또다른 이야기로 변주되어 나갈 것이다.

이 책은 몇 년 전 저자가 출간한 <한국가요사회사>(2021)와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일제강점기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근현대사의 가요들을 방대하게 소개하면서 작사가와 작곡가, 가수들의 삶을 그들이 살아갔던 시대와 연결하여 소개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익숙한 노래들을 흥얼거리듯 읽어나가면서, 한국사회를 살아갔던 이들이 마주했던 그 시대에 우리가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 어떤 질곡과 추억이 있었는지 반추하게 한다. 이런 재미와 함께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수준 높은 안목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 [마음 닿는 곳에 있는 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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