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 우리 반 맞아?" 고교학점제가 바꿔놓은 교실 풍경

이현주 2025. 6. 2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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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되려는 아이들, 약화되는 담임교사와 학생 사이 관계... 단순 실행 부족 아닌 방향의 문제

[이현주 기자]

 This is Brazil.
ⓒ flpschi on Unsplash
"OOO, 오늘 결석이니?"
"아니요. 지난 이동 수업 시간에 본 것 같은데... 조퇴했나?"

수업 종이 울리고 출석을 확인하는 시간, 한 학생이 보이지 않는다. 이동수업이 일상이 된 요즘, 출석을 파악하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OO이가 단지 수업에 조금 늦는 것인지, 아니면 조퇴를 한 것인지 알고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교실을 살펴보다 한 교실 구석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OO이를 발견했다. 쉬는 시간 내내 이전 수업 교실에서 잠들었는데 누구 하나 깨워주지 않은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어땠을까?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가, 주변 친구들이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고교학점제 안에서 학생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하나의 고립된 시간표, 수업 단위의 점으로 흩어졌다. 누구와 수업을 듣는지, 오늘 하루 누구와 마주쳤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관계의 붕괴이다. "그 친구 우리 반 맞아?"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이동 수업으로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줄어들고, 모둠활동을 해도 서로를 모른다. 이름을 부르기 어렵고, 의견을 묻기도 조심스럽다. 모둠 활동은 점점 '개별 발표의 연속'으로 변질되고, 협력은 형식만 남았다. 누구와도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지 않은 채, 그저 역할만 나눠 수행하는 수업. 아이들은 오히려 "혼자 하는 게 편해요"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 변화가 아이들의 사회성과 정서 성장에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교실은 단지 지식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갈등하고 협력하며 관계를 배우는 공간이다. 그런데 고교학점제는 그 기본 토대를 흔들었다. 관계가 얕으니 갈등이 깊어지고, 회복은 어렵다. 요즘 학폭이 더 복잡하고, 해결이 힘들다는 교사들의 말은 빈 소리가 아니다.

아이들의 고립을 더욱 가속화 시킨 고교학점제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오프라인 관계 형성이 더 중요하다. 익명성 높은 온라인 공간에 익숙한 학생들은 교실에서도 서로를 모른 채 생활하고, 이는 사회성 부족으로 이어진다. 공감력 부족, 충동적 대응, 정서적 고립. 이들이 바로 고교학점제가 놓치고 있는, 혹은 외면하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다.

코로나 시기를 돌이켜보자. 팬데믹 시작 전 많은 이들은 '머지 않아 학교는 사라질 것'이라 예견했다. 온라인으로 지식 전달이 가능한 시대에, 굳이 학교가 필요하냐는 물음도 나왔다. 그러나 전 세계는 금세 깨달았다. 학교는 지식을 넘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공교육은 학습의 장이자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는 결정적 공간이다. 코로나 키즈.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몇 년 동안 마스크를 벗지 못한 채 얼굴을 감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상징은 단지 보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정서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는 아이들의 고립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점심시간 교실을 둘러보면 급식을 먹지 않고 혼자 엎드려 있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배가 안 고파요", "배가 아파서요"라는 대답 뒤에는, 급식실에 함께 갈 친구가 없다는 고백이 숨어 있다.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혼자가 되고 있고, 고교학점제는 이런 아이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담임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로 약화되고 있다. 담임교사는 여전히 학급 학생에 대한 개별 상담을 하고, 학생의 특징과 장점을 학생부로 기재하는 행정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수업을 하지 않는 경우 학급 학생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중 고작 조종례 시간에 해당하는 몇 분에 불과하다.

배움에서 삶이 사라지고 학교는 입시 위한 경로 설정소가 되고

이전처럼 일상적인 수업 속에서 표정을 읽고, 변화를 감지하고, 작은 말 한마디로 다가가던 관계는 이제 가능하지 않다. 상담도 학생의 정서나 생활 중심이 아니라, 주로 진로나 과목 선택에 맞춰진다. "넌 뭘 하고 싶니?", "어떤 과목을 들어야 할까?"라는 진로 중심 상담은 결국 삶보다 스펙을 먼저 묻는 질문으로 바뀐다. 특히 부모의 지지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교사는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는 유의미한 타자였고, 믿음직한 조력자였다. 그런데 지금의 고교학점제는 그 구조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 배움에서 삶이 사라지고, 학교는 입시를 위한 경로 설정소가 되어버린다.

이에 더해 수업을 기반으로 한 관찰이 어려운 상황에서 작성되는 학생부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담임이 기록해야 하는 영역이 많은데, 담임의 수업을 듣는 학생과 듣지 않는 학생은 어쩔 수 없는 편차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수업을 듣는 학생에 한해 수업 태도나 정서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관찰과 기록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지는 구조는 교육의 공정성을 해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고교학점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취지는 좋은 제도인데, 지원이 부족했을 뿐"이라고 말 할 것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지금의 고교학점제가 초래한 교실 공동체의 해체, 관계의 단절, 정서적 고립, 심화된 경쟁, 사교육 확산, 학생 간 격차의 심화까지 감수하면서도 지켜야 할 만큼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방향인가? 단지 예산과 행정 지원만 보완한다고 해서, 이 방향 자체가 지닌 근본적 문제점들이 해결될 수 있는가?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하는 경험은 오직 교실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지식은 어디서든 검색할 수 있지만, 교사의 안내 속에서 맥락과 의미를 깊이 있게 연결하며 배우는 경험은 교실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공교육은 단지 교육과정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구조이고, 연대의 감각을 키우는 장치이다. 그런데 지금 고교학점제는 그 공동체를 해체하고, 교육의 본질을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실행의 부족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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