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투자기금을 조성하자

문진수 2025. 6. 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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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 바란다 : 금융 분야 정책 제안 ②

새 정부가 들어섰다. 정부가 바뀌면 정책이 변하기 마련인데, 잘 변하지 않는 영역이 금융이다. 정권 초기엔 늘 의미 있는 개혁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쪼그라들어 결과적으로 몸통은 그대로 둔 채 깃털만 만지다가 끝나기 일쑤다. 이글은 공공재(公共財)인 금융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 기획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기자말>

[문진수 기자]

팬데믹으로 지구 경제가 얼어붙어 있던 2019년 말, 미 연방의회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총 2조 2000억 달러의 경기부양 패키지를 통과시킨다. 이 긴급 예산 계획 안에는 급여 보장 대출프로그램(PPP)도 포함되어 있었다. PPP는 미 중소기업청(SBA)이 코로나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을 위해 자금을 융자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 급여 보장 대출 프로그램 안내문 대출 만기일까지 탕감을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SBA
500인 미만의 종업원을 둔 기업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1인 기업, 독립생활자도 포함된다. 이자율은 1%고, 전년도 직원 월평균 임금 총액의 2.5배까지 가능하다. 이 프로그램은 대출 즉 빌려주는 돈이다.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갚지 않아도 된다. 두 가지 조건이란, 대출금액의 75%를 직원 급여로 지출할 것, 나머지 25%는 임대료나 차량 운행비 등으로 사용할 것을 말한다.

2020년 초, 신청을 받기 시작한 지 채 2주도 지나지 않아 전국적으로 160만 건이 넘는 신청서가 접수되어 총 3380억 달러가 집행됐다. 조기에 자금이 모두 소진된 것이다. 미 중소기업청은 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을까. 경제가 어려우니 직원들 해고하지 말고 고용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 지원금은 '조건부 대출'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지만, 사실상 정부 보조금(subsidy)과 별 차이가 없다.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대출을 키웠다. 공적 보증기관에서 보증서를 찍어내게 하고, 정부 예산으로 금리를 보전해 주는 조건으로 은행 대출을 대규모로 확대했고, 기존 대출금의 원금 상환을 유예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결과는? 은행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고, 보증기관의 손실은 증가했으며, 가계부채의 총량은 전보다 훨씬 늘었다. 빚으로 빚을 막는 '돌려막기' 정책이 빚어낸 결과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무엇일까. 미국은 정부 재정으로 비용을 충당했고, 한국은 개인이 빚을 지게 했다. 미국은 지역금융기관(CDFI)을 동반자로 삼았고, 한국은 시중은행 창구를 활용했다. 미국의 자영업자는 어려운 위기를 잘 넘겼고, 한국의 자영업자는 빚더미에 깔려 신음하고 있다. 미국은 돈이 많아 이런 정책을 펼 수 있지만, 우리는 곳간이 비어 빌려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이 접근방법을 응용해서 새로운 금융 프로그램을 창안해 보자. 가칭 '사회투자법'을 제정해 정부 회계에 사회투자기금(social investment fund) 계정을 신설하고 정부는 예산을, 은행은 순이익의 일부를 의무 출연토록 한다. 이 기금을 설치하려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기본재산을 마련키 위해 5대 시중은행이 각 1조 원의 자금을 출연해 총 5조 원의 자금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 사회투자기금 작동 방식 정부, 금융회사, 혁신기업 간 협치를 통한 사회투자 프로그램
ⓒ 문진수
기업당 평균 10억 원을 사업자금으로 준다고 해 보자. 5조 원이면 총 2000개의 혁신기업을 지원할 수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실행력을 갖춘 기업 2000개가 우리나라 전역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가 있다. 비밀은 이 기금의 작동 방식에 있다.

작동 방식은 이러하다.

① 시민들에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해결 과제를 묻는다.
②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가진 혁신기업을 공개 모집한다.
③ 공정한 심사를 거쳐 대상자를 선발한 다음 사업 추진비를 제공해 준다.
④ 사업 성과를 평가해 인정된 부분을 융자금에서 탕감해 준다.
⑤ 혁신기업은 탕감된 부분을 제한 나머지를 기금에 반납한다.

투자 기금에서 돈을 지원받은 기업은 어떻게 해서든 융자금을 탕감받고 싶을 것이다. 사업비를 상환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많은 성과(outcome)를 내야 한다. 혁신기업이 이루어낸 성과만큼 사회/환경적으로 유의미한 가치(social value)가 창출되는 마법이 작동하는 것이다.

은행들은 출연금 부과가 부당하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금융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사회로부터 받은 특혜를 생각하면 이익의 일부를 사회로 환원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는 적은 예산으로 문제 해결을 도모함으로써 재정 효율을 높일 수 있고, 혁신기업은 재정적 압박 없이 가치 창출에 매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정부와 혁신기업, 금융회사 모두에게 유익한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발칙한' 구상을 현실화하려면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첫째는 법제화를 위한 시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국회/정부의 몫이다. 명분은 충분하다. 시장경제를 믿는 사람이든 국가의 역할을 중시하는 사람이든, 은행들이 지나치게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질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평가 체계를 정립하는 일이다. '혁신기업이 창출한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주제다. 평가의 정합성을 두고 말이 많겠지만, 가설을 세우고 현실을 맞추는 연역적(deductive) 접근이 아니라 경험을 축적해 가면서 보완해 나가는 귀납적(inductive) 접근법을 따르면 된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평가의 무결성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혁신을 창제하는 것이다.

좋은 법률과 제도는 세상을 바꾼다. 금융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공공성과 사회성을 강화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돈과 금융이 선하게 쓰일 수 있는 길을 창안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돈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상상력인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문진수 기자는 사회적금융연구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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