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러시아인 없이 살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9살 아들과 자동차 세계여행을 하다 갑자기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대에 선발된 아빠, 2024년 12월부터 약 1년간 남극기지에서 대기과학 연구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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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장비 해상 운송 고장난 세종기지의 중장비를 바지선에 태워 중국기지로 운송하고 있다. 부피가 큰 장비는 중국의 쇄빙선 도움을 받아 한국까지 운송된다. |
| ⓒ 오영식 |
"중국이 세종기지도 뺏으려는 거 아냐?"
세종기지를 방문한 중국 기지 대원들과 함께한 영상에 달린 반응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수백 개씩 쏟아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걸까?
편견과 선입견의 민낯 그리고 나의 고백
사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 혹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 특정 국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느낀 적이 있다. 관광지에서 질서를 무시하거나, 큰 소리로 행동하거나,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면 불편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런 일부의 행동이 어느새 '그 나라 사람들은 다 그렇다'는 식으로 일반화되고, 내 마음속에 편견으로 자리 잡아버렸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런 집단적 선입견 속에 있었던 것 같다.
2년 전, 나는 아들과 함께 세계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자동차를 러시아로 가져가 동쪽 끝에서 서쪽 라트비아 국경까지 횡단한 적이 있었다. 워낙 넓은 나라이다 보니, 러시아 한 나라를 통과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당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한국 역시 제재에 동참한 국가 중 하나였고, 직항 노선마저 끊긴 상태였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혹시 러시아인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불편해하진 않을까? 정치적 감정이 일상으로 번지진 않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내가 만난 러시아인들은 모두 친절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불쾌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관심을 보이며 처음 본 우리 부자를 집으로 초대하고 환대해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깊이 느꼈다.
'국가와 국민을 꼭 동일시할 필요는 없구나. 사람은, 어디에서든 다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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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기지 앞 이동식 플로트 부두 시설이 없는 남극 해안가에 선박이 접안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기지의 도움이 필요하다 |
| ⓒ 오영식 |
지구 끝에서 마주한 진짜 인간관계
세종기지는 다른 나라 기지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게 설립됐다. 그래서 칠레, 러시아, 중국 등 이웃 기지들과는 바닷길로 약 10km가량 떨어져 있다. 육로는 '크레바스'라 불리는 빙하 균열지대로 막혀 있어, 다른 기지들처럼 차량 이동이 불가능하다. 결국 세종기지에서 활주로가 있는 기지까지 가려면 고무보트를 이용한 해상 이동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여름철, 마지막 보급품을 받는 시기가 다가오면 소형 선박을 띄워야 한다. 문제는 이곳에 바닷가에 제대로 된 부두 시설을 갖춘 기지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활주로와 가장 가까운 러시아 기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소형 선박을 안전하게 접안시키기 위해선 러시아 기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보급품이나 인원을 수송하기 위해 러시아 기지 쪽으로 운항할 땐, 사전에 협조를 요청한다. 그러면 러시아 대원이 미리 나와 이동식 플로트를 바다에 설치해준다. 바다에 떠 있는 선박을 안정적으로 접안시키는, 작지만 절대적인 협력이다.
가장 험한 환경 속에서 꽃피운 연대
이런 협력은 생명을 구하는 일에도 이어진다. 얼마 전, 중국 기지의 한 대원이 갑작스러운 뇌졸중 증세로 쓰러졌다. 하지만 이곳은 4월부터 10월까지는 정기 항공편이 끊긴다. 킹조지섬과 가장 가까운 육지는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라는 도시인데, 이곳까지는 무려 1,200km. 그 사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험한 바다로 불리는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이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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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극 킹조지섬의 기지 교류 행사 킹조지섬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 주변 국가들과 자주 교류하며 친분을 쌓는다 |
| ⓒ 우재호 |
이곳은 고립된 생활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이 부족해진다. 6월이 넘어서면 보급창고의 신선식품은 물론, 주류와 간식까지 동이 나는 일이 잦다. 그럴 때면 인접한 기지에 도움을 청한다. 자국에서 여유 있는 식품을 건네고, 필요한 물품을 서로 교환한다. 이름만 다른 기지일 뿐, 이곳에선 모두가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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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극지 연구선 방문 영국의 탐사선이 세종기지에 방문해 부족한 버터와 신선 식품을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주었다 |
| ⓒ 오영식 |
날씨가 좋은 날이면, 다양한 교류활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농구장이 있는 기지에 가서 경기를 하고, 풋살장이 있는 기지에서는 함께 뛰고 땀을 흘린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기지에선 남미 전통음식을 맛보고, 살사를 함께 춘다. 세종기지에선 젓가락을 건네며 한식을 대접하고, K-팝을 부르며 웃음을 나눈다.
서로의 SNS에 올라온 가족사진을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감의 댓글이 달린다.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 꺼낸 자녀 사진 한 장에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운다. '먼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이 있다. 지금 이 남극에서는, 그 말이 더없이 실감 난다. 오히려 1년 가까이 볼 수 없는 가족보다도, 지금 옆에 있는 이 사람들이 더 자주 웃고, 더 자주 안아주는 존재가 된다.
그 사람이 어떤 정부 체제 아래에서 왔는지, 세상의 뉴스에서 어떤 나라로 분류되는지는 여기선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건, 그저 가족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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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기지 옆 마리안 소만과 빙붕 세종 기지는 크레바스에 막혀 다른 기지까지 육로 이동이 불가능하다 |
| ⓒ 오영식 |
비판은 자유다. 정책과 체제,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는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사람 자체를 향한 일반화, 얼굴 없는 혐오, 무심한 편견은 또 다른 형태의 오염이다. 남극은 지구에서 가장 깨끗한 땅이라 불린다. 하지만 마음의 오염은, 이곳조차 더럽힐 수 있다.
세종기지에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휘날린다.
그러나 이곳은 국기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아들 손잡고 세계여행”)와 유튜브 채널(“오씨튜브”)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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