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채 잡혀 끌려간 엄마, 여든 할머니는 아직도 악몽을 꾼다

정영자 2025. 6. 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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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이후를 살아온 여성 삼대의 삶 ①]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이야기

이 글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부모를 잃고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살아온 1944년생 여성의 기억을 담은 회고록입니다. 무참히 희생된 아버지와 끌려간 어머니를 떠올리며 울고 떨던 비극 속에서도, 한 여장부의 헌신과 사랑이 한 아이의 삶을 어떻게 지탱했는지를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전합니다. 이 글은 20여 년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리는 데 힘써온 박만순 작가(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권유로 썼습니다. <편집자말>

[정영자 기자]

나의 외할머니, 장순이

나의 외할머니, 장순이는 조선 시대 여성으로, 경북 단촌 마을에 살던 총각 마북출씨와 혼인했다. 두 딸, 그러니까 나의 어머니와 이모를 낳고 평범하게 살던 중, 남편이 작은 부인을 얻어 이북으로 떠나버렸다. 외할머니는 시댁에 남아 시부모를 모시며 홀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댁에서는 큰딸인 이모만 남겨두고, 외할머니에게 갓 젖을 뗀 어린 딸, 즉 나의 어머니를 데리고 문경으로 재혼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는 문경에서 자랐고, 16살 무렵 일본강점기 '색시 공출'을 피해, 이웃집 머슴이었던 정용삼, 곧 나의 아버지와 데릴사위 형식으로 혼인했다. '색시 공출'이란 지금 말하는 위안부 징집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나와 동생을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려갔다. 그러나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마을에 탈바가지 쓴 국군이 들이닥쳤다. 피바람이 불었고, 아버지는 구장네 집에서 끌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지만, 끝내 다시 끌려갔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끌려가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오후, 군인들은 새끼줄에 묶인 피범벅의 사람들을 산 밑으로 끌고 갔다. 나는 동생을 업은 엄마 뒤를 따라가다가 "더 따라오면 쏴서 죽인다"는 국군의 총부리에 가로막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었다.
 문경읍 갈평리에 세워진 위령비. 갈평리 주민들이 1949년 대한민국 군인에게 학살된 사건
ⓒ 박만순
피난길 위의 아이

큰아버지를 따라 충주로 내려가 잠시 머물렀지만, 곧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외할머니를 따라 범바우골에 터를 잡았다가, 발티재를 넘어 방공호 옆 돌담집을 전전하며 피난민들 틈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아직도 또렷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외할머니가 어디선가 얻어오신 주먹밥을 소금에 찍어 먹던 순간이다. 그러다 비행기가 낮게 깔리듯 날아들고, 땅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총성이 터지면, 우리는 다시 산을 넘고 풀숲을 헤치며 물길을 따라 끝없는 피난길을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월악산 자락 아래, 아버지의 고향이자 친할머니가 살고 계신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평온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논에서는 국군들이 훈련을 하는지 연일 총성이 하늘을 가르고, 남자들은 머리띠를 두른 채 무언가를 외치며 행진했고, 어른들은 말없이 울음을 삼켰다.

설상가상으로 마을에는 호열자(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병든 사람들이 속출했고, 죽어나가는 이들도 허다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할머니를 비롯해 큰 엄마, 작은 엄마, 우리 엄마, 외할머니까지, 가족 모두가 병에 걸려 혼절하다시피 쓰러져 있었다. 집안 전체가 유령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엄마와의 이별

그때 친할머니만 세상을 떠나셨고, 나머지 가족들은 힘겹게 버티며 하나둘 일어섰다. 하지만 마을 곳곳에서는 여전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거적으로 덮인 시신을 지게에 지고 가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폭풍우 같은 시절을 견뎌냈고, 결국 네 식구는 천씨네 사랑방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곳 부엌은 거적을 덧댄 소 외양간 같은 곳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윗마을의 동네 사랑방으로 다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과 호열자, 그 모든 시련을 버텨낸 우리는 비로소 조금씩 안정을 찾아 조용히 살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평온도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문경에 있던 집을 팔러 간 사이, 탈바가지 쓴 상이군인이 큰 눈을 굴리며 총을 멘 채 구두발로 방 안에 들이닥쳤다. 그리곤 아무런 말도 없이 엄마를 무작정 끌고 가버렸다.

엄마가 끌려간 뒤, 나는 두려움에 울지도 못한 채 우는 동생의 입을 막고 이불 속에서 벌벌 떨었다. 전쟁보다 더 무서웠던 그 밤, 엄마는 봉두난발이 된 모습으로 캄캄한 산길을 달려 돌아와, 먼동이 틀 무렵까지 우리를 꼭 끌어안고 떨며 울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 상이군인들이 다시 들이닥쳐 욕설을 퍼붓고, 엄마를 발로 차고 머리채를 잡아끌며 또다시 데려갔다. 그날의 기억은 평생 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금도 나는 숨고 쫓기는 악몽 속을 헤매고 있다.

문경에서 돌아온 외할머니는 엄마가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넋이 나간 듯 담배만 피우셨다. 나는 말없이 곁에 앉아 눈물을 닦아드렸고, 외할머니는 우리 남매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그 뜨거운 품은 지금도 가슴 저리게 아련하다.
 정영자씨의 어머니 마태화씨
ⓒ 정영자
외할머니는 여장부

외할머니는 딸을 잃은 한 맺힌 가슴앓이에도 우리 남매의 끼니 걱정부터 앞세우셨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오직 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셨다. 밤낮없이 남의 집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길쌈을 해주며, 논일이며 밭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에 파묻혀 사셨다. 땀에 절어 늘 젖어 있던 외할머니의 베적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마 후, 외할머니는 소식이 끊긴 어머니가 개울 건너 새터말에서 '본처 딸을 키우며 시집살이를 한다'는 소문을 들으셨다. 더 무서운 이야기도 떠돌았다. '의부가 군대에 간 사이, 본 부인이 이웃 남자와 눈이 맞았고, 결국 그 남자는 총에 맞아 죽고 어머니는 쫓겨났다'는 소문이었다.

그 시절은 상이군인이 세상을 지배하던 무법천지였다. 외할머니도 딸을 상이군인에게 '도둑맞고도'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깊은 가슴앓이를 안고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다. 그렇게 어머니를 발치에 두고 그리다가, 외할머니는 향년 59세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약 한 첩도 써보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짧은 생을 살아내신 외할머니는 여자의 몸으로 아버지가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용해수 대파'라는 곳까지 작은아버지를 데리고 직접 찾아가셨다. 피범벅이 되어 퉁퉁 부은 시신들 속에서 아버지의 옷과 손을 더듬어 장례를 치르셨다고 했다.

그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들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오신 외할머니의 한숨과, 말 못 할 만큼 쌓인 한과 눈물을 어떻게 다 말로 풀어낼 수 있을까. 외할머니의 흔적이라곤 긴 곰방대에 꾹꾹 눌러 담은 잎담배를 피우며 넋을 놓고 앉아 계시던 그 모습뿐이다. 그 모습은 아직도 내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려,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녹아내리고 눈물이 쏟아진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럼에도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 이사 온 뒤, 2년 넘게 구호 물품을 받으며 윤참판네가 살던 집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송계분교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었지만, 외할머니가 남부럽지 않게 사랑을 주셨던 그 3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 외할머니는 누에고치 실로 짠 명주에 노랑과 빨강 물을 들여 다듬이질한 치마저고리를 직접 꿰매 입혀 주셨다. 날마다 나를 이리저리 바라보며 예뻐해 주시던 외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입은 거지는 밥을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그 말, '옷이 날개'라는 뜻을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다.

외할머니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도 예쁨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그 시절 함께하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며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철없던 시절은 있겠지만, 나는 외할머니의 사랑이 너무 커서, 더 철없던 아이였던 것 같다.

외할머니의 거칠고 두툼한 손이 등을 쓸어주실 때면 세상 어떤 약보다도 더 시원했다. 동생과 다투며 외할머니 손길을 혼자 차지하겠다고 다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외할머니는 우리를 꼭 껴안고 수없이 타이르셨다. 그토록 귀찮아하시면서도 늘 품에 안아주셨던 그 시간이, 이제는 가슴 깊은 그리움으로 남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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