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지휘하는 스리랑카 반장…용접 명장된 인니 기술자 [조선도시 두얼굴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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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황 조선업 현장, ‘안전조회’ 맡은 최초 외국인 반장
지난 13일 울산 동구 HD현대중공업. 조선소 도크(배 건조장) 한편에서 1000t 넘는 대형 크레인이 바쁘게 움직이며 기계음을 냈다. 묵직하면서도 경쾌한 망치질 소리가 ‘탕탕탕’ 끊이지 않았고, 곳곳엔 선박 블록이 쌓여 있었다. 호황으로 3년 치 이상 일감이 쌓인 조선소는 이처럼 분주하게 돌아가며 활기가 넘쳤다.
이곳 선박 건조 작업의 한 축을 맡아 이끄는 외국인 근로자가 있다. 조선소 현장 1호 2야드 도장 공장 외국인 ‘반장’인 스리랑카 출신 쿠마라(36)다. 그는 지난해 4월 외국인 최초로 이 조선소 사내협력사 현장 반장에 선임됐다. 이후 1년 넘게 한국인 10명과 스리랑카, 베트남 등 외국인 15명으로 꾸려진 도장 부문 1개 반을 이끌고 있다.

쿠마라는 선박 도장 마무리 작업 ‘터치업(붓 도장)’ 업무를 지휘하면서 작업 안전을 책임지고 팀원들에게 작업 수칙을 전달한다. 매일 아침 현장 반장의 고유 업무인 작업 전 TBM(Tool Box Meeting, 안전조회) 역시 쿠마라의 몫이다. 한국어로 당일 유의 사항을 먼저 전하고, 스리랑카어로 한 번 더 설명한다. 쿠마라는 “스리랑카·한국 팀원들 간 소통을 담당해 안전하고 효율적인 업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외국인 최초 ‘최고난도 용접 기술’ 자격 딴 인니도
쿠마라처럼 호황기 조선소 부족한 인력을 메운 외국인 근로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주로 용접·도장 분야에서 주요 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중엔 내국인 근로자도 쉽지 않은 최고봉 용접 기술 자격을 한국에서 취득한 외국인 근로자도 있다. 한화오션 사내협력사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국적 용접사 라피히다얏(28)다. 입국 2년차인 라피히다얏은 올해 4월 ‘6GR’ 용접 자격을 땄다.
6GR은 45도 기울어진 배관을 연결 부품 등 장애물이 있는 상황에서 이어 붙이는 최고난도 용접 기술이다. 위·아래 보기, 수평·수직 등 모든 자세에서 용접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주로 해양 구조물 작업에 많이 쓰인다.

한화오션 조선소에서 처음으로 이 자격을 얻은 외국인 근로자다. 이 조선소 내 2만명이 넘는 내·외국인 생산직 근로자 중 1% 미만(약 200명)만 보유한 기술로, 외국인 근로자 4300명(지난해 말 기준) 중에선 현재 5명 내외만 갖고 있다.
라피히다얏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용접봉이 달라 적응하는데 조금 애를 먹었지만, 한화오션 기술교육원에서 2주간 교육 받은 게 큰 도움이 됐다”며 “여기서 반장까지 하고 싶어, 퇴근 후 졸린 눈을 부여잡고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만약 (용접 품질 검사·관리하는 전문가인) 검사관도 해보고 싶다”며 “아내가 임신 중인데, 곧 한국으로 데려올 계획”이라고 했다.
통역하다 교수 된 외노자…작업장 잘못 쓴 외국어 안전판 바꿔
조선소 산업 현장에서 통역사로 근무하다 국내 대학 ‘산업안전’ 분야 교수로 취직, 지역 사회에 정착한 외국인 근로자도 있다. 경남 창원시 창신대 스마트팩토리학부 라지타 가우설야(38) 교수다. 스리랑카 국적으로 라지타 교수는 2022년 4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2년 넘게 삼성중공업에서 외국인 근로자 인사·교육 담당 겸 통역사로 일했다.

2008년 한국에 유학 와 경남 김해 인제대에서 산업안전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라지타 교수는 조선소 외국인 근로자가 증가하기 시작한 2022년 삼성중공업에 들어갔다. “안전은 소통이 중요하다”며 “또 산업안전 분야 전문가이기도 하니, 내·외국인 근로자 간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라지타 교수는 스리랑카, 인도, 파키스탄 등 3개 국어가 가능하다.
실제 라지타 교수가 지적한 의사소통 현장도 있었다. 내국인이 잘못 적은 화재 위험 경고 안내문이 대표적이다. ‘NO OPEN FIRE’이란 뜻을 담은 외국인 근로자 안내 문구가 스리랑카 말(신할라어)로 ‘ගිනි දැල්වීමෙන් වළකින්න(화기엄금)’이 아닌 ‘විවෘත වෙඩි තැබීම් නැත(총을 쏘지 말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라지타 교수는 “단순 번역기를 돌려 작성한 실수인지 알 수 없지만, 엉터리 번역은 외국인 근로자를 위험에 노출할 수도 있어 수정을 요구했다”고 했다.
귀화한 스리랑카 출신 아내와 6개월 된 아들과 함께 한국에 정착한 라지타 교수는 대학에서도 국내 이주 노동자의 안전 관리 분야를 연구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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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노자↑ 조선소…한국어·직무 교육에 할랄 식단도
외국인 근로자 비중이 커진 빅3 조선소는 작업 현장 안전과 한국 적응을 돕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했다. 한국어·직무 교육과 함께 통역 인력 배치, 국가별 안전가이드북 제작 등이 대표적이다. 또 외국인 근로자 ‘밥심’을 위해 주기적으로 ‘할랄 푸드’ 등 현지식을 제공 중이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외국인 근로자는 작업 현장의 중요 인력으로 자리매김했다”며 “부산시티투어버스 등 한국 문화 적응과 함께 조선소에도 잘 안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거제·울산=안대훈·김민주·김윤호·위성욱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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