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공백 해소 위한 '지역재투자법'이 필요하다

문진수 2025. 6. 1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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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 바란다 : 금융 분야 정책 제안 ①

새 정부가 들어섰다. 정부가 바뀌면 정책이 변하기 마련인데, 잘 변하지 않는 영역이 금융이다. 정권 초기엔 늘 의미 있는 개혁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쪼그라들어 결과적으로 몸통은 그대로 둔 채 깃털만 만지다가 끝나기 일쑤다. 이글은 공공재(公共財)인 금융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 기획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기자말>

[문진수 기자]

금융위원회가 매년 발표하는 것 중 '지역재투자 평가'라는 제도가 있다.

2018년에 도입해 2020년부터 시행된 제도인데, 시중은행(7), 특수은행(3), 지방은행(5), 상호저축은행(12) 등 총 27개 예금 수취 은행을 대상으로 지역사회 재투자 현황을 평가해 결과를 발표한다. 간단히 말해, 지역에서 영업하는 금융회사가 지역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평가하는 제도다.
▲ 2024년 금융회사 지역재투자 평가 결과 금융위원회가 예금 수취 은행을 대상으로 매년 평가해서 발표함
ⓒ 금융위원회
2024년 평가 결과를 살펴보자.

최우수(9), 우수(7), 양호(3), 다소 미흡(4), 미흡(3)으로 평가 대상 금융회사 중 74%(20개)가 '양호' 이상의 좋은 점수를 받았다. 5개 부문, 15개 항목을 평가해 종합한 성적표다. 5개 부문이란 지역자금 역외유출, 중소기업 지원, 서민 대출 지원, 인프라 투자, 지역금융 지원전략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은행의 7할 이상은 지역 재투자를 잘 이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역재투자 평가 제도는 미국의 지역재투자법을 모방해 설계된 것이다. 1977년에 제정된 미국 지역재투자법(Community Reinvestment Act)은 일정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금 수취 금융기관이 지역사회의 신용 수요를 수용하도록 의무화한 법률이다. 저소득층이나 소수민족, 소기업 등 금융 취약계층에 여신을 제공하고 낙후된 지역 개발을 위해 투자하라는 것이다. FRB, OCC 등 연방정부 감독기관들은 평가 대상 금융회사들의 실행 여부를 살핀 후, 네 등급(뛰어남/만족스러움/개선 필요/미이행)으로 분류해 결과를 공시한다. CRA 심사를 받은 은행 역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 등에 관련 내용을 게시해야 한다.

이 성적표는 은행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국의 감독기관들은 CRA 등급을 금융 공백 해소를 위한 지렛대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개선 필요' 이하 등급을 받은 은행이 제출한 인수합병 신청은 거부될 수 있다. 이 은행이 정부의 허가를 받으려면 낮은 점수를 받은 활동을 개선한 다음 재신청을 해야 한다.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금융회사에 불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지역재투자 평가제도는 잘하는 은행에 혜택(incentive)을 제공할 뿐, 못하는 은행에 페널티(penalty)를 부가하지 않는다. 금감원의 경영 실태 평가나 지자체/지방교육청 금고 선정 기준 등에 가점을 주는 수준이다. 불이익을 받지 않으니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공들일 이유도 없다.
▲ 지역재투자법(미국) vs 지역재투자 평가제도(한국) 비교표 미국은 법률적 의무사항, 한국은 제도적 권장사항이다
ⓒ 문진수
미국은 기관 자산 규모, 지역 특성, 차주(借主)의 소득분위, 금융 서비스의 종류에 따라 평가 방식이 차별화되어 있다. 정밀한 평가를 통해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우리는 모든 지역, 모든 기관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 은행은 인구 천 명당 점포와 자동화기기 숫자를 보는 인프라 부문을 평가하지만, 저축은행은 이 부문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평가의 신뢰도는 어떨까.

지방은행 5곳 중 4곳이 '최우수' 등급을, 1곳이 '우수' 등급을 받았다. 지방은행은 지역/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의아한 대목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2023년도 전북 지역의 수신액 대비 여신액 비율(예대율)은 70.6%였다. 지역 예금자가 맡긴 돈 중 지역 안에 대출된 자금 비율이 7할이고 나머지 3할은 지역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뜻이다. 역외 유출은 은행 평가의 35%를 차지하는 핵심 부문이다. 그럼에도 전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은행 가운데 1곳(수협)을 뺀 모든 은행이 '양호'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은 평가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지역재투자를 법률로 강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에 돈이 돌게 하기 위해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금융회사가 지역의 신용 수요(credit demand)를 수용하도록 의무화하면 지역에 많은 변화가 만들어진다. 신용 점수가 낮아서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개인이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기회가 생기고, 긴급한 운전자금 때문에 힘들어하는 소기업·소상공인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낙후 지역 개발을 위한 투자 활동도 촉진된다. 녹지 개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단지 조성 등 생활/주거 환경 개선에 기여한 투자 사업을 적격 투자(eligible investment) 항목으로 지정, 평가에 반영하면 된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이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개진되었지만, 정부와 국회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입법화에 반대해 왔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원격지 대출이 가능해지면서 금융회사와 차주(借主) 간 지리적 중요성이 약화했다는 점, 신용할당을 강제하면 금융회사의 자율성이 침해되고 시장의 효율적 자원배분을 훼손한다는 점 등이 대표적인 반대 사유다.

2022년 말 기준, 인터넷전문은행을 이용하는 고객 수가 3400만 명을 넘어섰고, 3개 은행(케이, 카카오, 토스)의 총자산이 80조 원에 가깝다는 점, 금융거래 전 영역에서 비대면 거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 지역재투자 관련 대출이 수익성은 낮고 연체율은 높은 특징을 지녔다는 점 등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런 시대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미국 금융 당국은 심사 방식을 고도화하는 등 지역재투자 평가 체계를 훨씬 강화하고 있다. 감독기관 간 이견 조율을 거쳐 발표(2022.5월)된 개편안을 살펴보면, 생태계 보전 활동을 적격 투자로 인정하고 정량적 수치를 기초로 한 매트릭스(matrix) 평가 방식을 통해 객관성을 높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 정부가 지역재투자 심사 체계를 강화하는 이유는 팬데믹 이후 지역, 인종, 소득에 따른 신용 접근 불평등(credit access inequality)이 이전보다 훨씬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1위의 핀테크(fintech) 강국이다. 기술 발달에 따른 금융거래 방식의 변화와 신용 공백을 메우는 작업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사안임을 말해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중앙과 지방 사이의 신용 접근성 격차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는 비단 은행 점포나 자동화기기 숫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은 전국 대비 금융 수요 비중에 비해 공급이 상대적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지방은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비교하면 수도권의 금융 공급이 많지만, 서울을 제외하면 수도권이 지방보다 금융 수요 대비 공급이 더 적다는 점이다. 경기와 인천 지역에 큰 규모의 신용 공백(credit gap)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수도권 안에서 서울과 비서울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한다.

기업 여신(=대출)을 살펴보면, 은행과 상호저축은행의 기업 여신은 서울이 수요 대비 공급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신협, 새마을금고, 농수산림조합 등 상호 금융회사의 기업 여신은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신 대부분은 담보대출이다. 지방에 근거지를 둔 기업들이 은행권에서 신용대출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금융위 보고서(2024, 지역별 금융 공급 관련 경쟁 현황 평가 결과)는 '지방의 금융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예금 취급 기관의 신용대출 활성화 방안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미국이 그런 것처럼, 우리도 금융회사의 지역 재투자를 의무화한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 정부의 과보호 속에 매년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지만, 은행들이 신용 공백 해소를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할 가능성은 영(=zero)에 가깝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문진수 기자는 사회적금융연구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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