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만나다'...1980년, 광주를 지켰던 그날의 이야기
5.18 민주화운동 '최후의 시민군' 경창수씨가 전하는 '그날'
1980년 광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당시 시민군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했던 18살 소년.
그로부터 45년이란 시간이 흘러 어느 덧 나이도 6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제가 바로, 80년 광주 도청에 남아있던 소년입니다."
서귀포 6월 민주항쟁 정신계승사업회(회장 이영일)는 14일 오후 5시 서귀포축협 축산플라자 회의실에서 '6월 민주항쟁 38주년 기념 초청 특별강연회'를 열었다.
이번 특강의 주제는 '1980년 광주, 도청에 남아있던 소년을 만나다'.


그는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 도청에 남아 마지막까지 광주를 지키고자 했던 최후의 시민군이었다. 그 때 소년의 나이 18살(동신고 3학년 재학 중).
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소년은 상무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평생 지을 수 없는 고통과 후유증을 안고 살아 왔다. 이후 1981년 3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984년 민주화운동 시위 관련으로 퇴학당했다.
이번 강연에서는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고 직접 겪은 그날의 광주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진압과 발포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그 참혹한 현장에서, 소년은 왜 계엄군에 맞서게 된 것일까.
그의 이야기는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사연과 비슷한 점이 많다.
경창수씨는 고3이었던 당시, 항쟁의 중심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게 된 결정적 이유는 친구 어머니의 전화 때문이었다고 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그날(5월 18일) 일요일이어서 집에 있었는데, 저녁 9시쯤 친구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친구가 안 들어오는데 좀 찾아보라고. 그래서 다음 날 친구를 찾으면서 하다보니 이렇게 참여를 하게 됐죠."
그는 "처음에는 이 친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며 "나중에 5월27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이 끝난 후에야 그 친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친구는 그날(18일) 트럭에 실려서 영창에 들어가 있었는데, 도청 진압 때 많은 사람들이 잡혀들어오니 나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항쟁에 뛰어든 5월 19일부터 고교생인 그가 했던 일과 활동은 외신 저널리스트 등에 의해 촬영된 사진 속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몇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그 첫 번째는 중앙일보 기자가 촬영한 것이라고 밝힌 5월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와 대치 중인 시민 군중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사진 속 왼쪽 맨앞 지점에는 파란색 동신고 체육복을 입고 앉아 있는 소년이 모습이 보인다. 바로 주인공이다.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마친 후 '군부통치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가 행진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외신 기자(노먼 소프) 사진에서는 경창수씨가 맨 앞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포착돼 있다.
또 다른 외신 기자(프랑수아 로숑)의 사진에서는 경창수씨가 흰머리띠를 두르고 시신 운구에 참여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전남도청 민원실과 본관 사이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들이 놓여져 있는 사진도 있었는데, 사진 속 뒤편에는 경찰수씨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에서는 항쟁 기간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은 물론, 시신 관리와 같은 역할도 맡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소년의 온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고교 1학년인 동호가 실종된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 시신 안치소에서 시신 수습을 하는 일을 자원했던 것과 비슷하다. 물론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인물은 아니다.
경씨는 "<소년이 온다>에 고등학생들이 대개 시신 관련된 얘기들을 많이 했었죠"라며 자신도 시신 관리 일을 했었다고 했다.


그날의 기억 마지막은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이 있었던 27일 새벽으로 이어졌다.
계엄군이 곧 밀고 들어올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아 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고교생인 경씨 역시 도청을 빠져 나갈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경씨를 비롯한 '최후의 시민군'은 도청에 남아 광주를 지키기로 했다.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됐다. 경씨는 진압이 시작된 후 저항을 하다가 정문 쪽에서 터진 폭탄에 손에 부상을 입었다.
"총탄이 빗발쳤고, 정문에서 갑자기 폭탄이 터졌는데, 터지자 마자 손을 올렸어요. 얼굴을 가렸어요. 철모를 썼으니까 뇌에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에 부상을 입은 거죠. 그래서 도청 본관 뛰어들었는데, 2층에서 잡혔죠."
계엄군에 끌려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부상을 입은 손도 평생 상처로 남았다.
"병원 여러군데를 알아봤는데, 다 똑같이 얘기해요. 이걸 손대면 신경을 건드려서 손을 못 쓴다고 그러는 거예요. 신경이 다 끊어진다. 그래서 그냥 놔뒀는데, 지금도 악수를 할 때면 좀 아파요. 전에는 아예 악수를 안 하고 했는데, 지금은 악수를 (하기는 하는데) 하면 아픕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에도 통증이 심했어요."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잊혀질 수 없는 그날의 기억 속에,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민주화운동 시위를 벌이다 퇴학 당했고, 1990년대 후반에야 우여곡절 끝에 졸업했다고 한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귀포시지역에서는 '대통령은 내 손으로'라는 플래카드를 내걸로 거리 시위를 벌이는 모습의 사진을 보았다"며 "5.18 광주항쟁은 제주도의 4.3, 6월항쟁은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하는데, 잊지 말고 계승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무리 말을 대신해 독일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유명한 경구를 제시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
◇ 서귀포 6월항쟁은...
한편, 이날 특별강연회에는 서귀포 6월민주항쟁 정신계승사업회 이영일 회장을 비롯해, 1987년 서귀포 6월민주항쟁을 기억하는 이들이 참석했다. 고의숙 제주도의회 교육의원, 이용중 식민사관청산 제주회의 준비모임 공동대표,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의 송문석 서귀중앙여자중학교 교장 등도 함께 했다.

청년들이 주도한 서귀포 항쟁은 들불처럼 확산된 독재권력에 대한 국민들 분노가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마침내 독재정권으로 하여금 무릎을 끓게 했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서귀포시 지역 거리시위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6.10 민주항쟁의 열기를 보여주는 국내 중요 사료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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