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의 화살 하나로... 고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지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어느 시대건 민중이 주역이 아닌 역사는 없다. 이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특히 위급에 처하면 그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다. 천대나 멸시와는 별개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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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인(팔도군현지도) 붉은 점이 용인 읍치. 그 아래 고현(현내면), 도촌면, 서촌면, 남촌면이 합쳐져 현재의 '남사읍'이 되었다. 남쪽 4개면을 합했다는 의미다. 고현의 창고 자리를 현재의 '처인성'으로 추정한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고려도 마찬가지다. 1231년 8월 칸을 대신해 '살리타'가 몽골 군대를 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1차 침공이다. 귀주성 등 강한 항쟁에도, 개경이 고립되니 몽골이 강요한 항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충주에 이르기까지 약탈당하고 난 12월이다. 살리타는 72명의 다루가치를 남겨 정복지 관리를 맡기고 이듬해 정월 철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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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인성 성벽 처인성 동쪽의 성벽과 주변. 흙으로 쌓은 성으로, 그릇으로 치자면 막사발 격이다. |
| ⓒ 이영천 |
처인성
흙으로 쌓은 네모난 성곽이니, 그릇으로 치자면 막사발 격이다. 성곽의 시원은 경작과 정착의 농업혁명이다. 원시 공동체는 띠 풀을 엮어 외부와 경계 삼았다. 이게 울타리로 되었다가 목책으로, 다시 흙으로 변모한다. 경계 밖엔 물길을 끌어 해자를 팠다. 처음 형태는 둥근 원이다.
공동체 규모가 커지면서 형태와 재료가 변하기 시작한다. 원이 해체되어 네모꼴로, 크기도 점차 넓어져 간다. 내성과 외성이 중첩되기도, 모양이 방어에 유리한 별 모양을 띠기도 한다. 흙에서 돌로 바뀌고, 높이도 점차 높아져 간다. 목숨이건 재산이건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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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인성 평면도 낮은 구릉에 지어진 처인성 평면도. |
| ⓒ 이영천(현장안내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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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인성 구릉에 중심 토루를 판축공법으로 쌓고, 그 양쪽에 흙으로 덧대어 경사를 세웠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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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문 낮은 성밖에서 급경사로 오르게 설계되었다. 성문이 뚫려 적이 침입해 오면 사방에서 협공하는 구조다. 문루는 사라지고 없다. |
| ⓒ 이영천 |
처인성 전투
처인성은 천안이나 청주, 충주로 나가는 주 교통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수원에서 평택으로 가거나, 용인에서 안성으로 가는 간선축에서도 벗어나 있다. 단지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부수적인 교통로에 불과하다. 따라서 몽골 침입 당시 난을 피할, 최소한의 방어에만 적합한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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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인성 전투 전투 장면을 재현한 기록화. 경사진 처인성이 잘 표현되었다. 화살 맞은 살리타가 죽어 가는 장면이 보인다. |
| ⓒ 이영천 |
처인성으로 살리타가 끌고 온 병력 규모 또한 미상이다. 대구 팔공산까지 쳐들어가, 거란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아보겠다며 76년간 만든 초조대장경과 이를 보관하던 부인사(符仁寺)까지 불태웠으니, 분명 완전체의 군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살리타는 왜 이 주먹만 한 성곽을 공격했을까? 천대받는 부곡민 일색이어서, 재물이 많다거나 주요 인물이 있어 공격의 가치가 높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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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인성 전투 처인성 전투 기록화를 처인성 밖에 화강암으로 재현해 냈다. 김윤후가 화살로 살리타를 겨누는 순간이다. |
| ⓒ 이영천 |
김윤후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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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첩비 성밖 동쪽에 세워진 '처인성승첩기념비'와 길 바닥에 돌로 새겨 놓은 처인성 모습. |
| ⓒ 이영천 |
당시 승려의 위상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조선의 그것보다는 나았으리라. 고려는 불교의 나라 아니던가.
오른 벼슬이 승려보다 더 안락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김윤후의 요청일 수 있겠으나, 처인성 위상이 부곡에서 속현도 아닌 주현으로 2단계나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성에 살던 백성들 처우와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김윤후가 원한 게 이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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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인성(1970년대) 낮은 구릉처럼 방치되어 있던 처인성의 옛 모습. |
| ⓒ 이영천(현장안내촬영) |
김윤후에 대한 기록은 1263년에서 멈춘다. 생몰 미상이다. 조선도 김윤후를 후하게 평가한다. 임진왜란 때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김윤후의 활약을 거론한다. 영조 때 인사의 중요성을 말하며 또 언급되었으니, 그를 표본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바탕은 민본이다. 또한 민중이다. 손바닥만 한 성곽에서 모두가 사는 길을 그가 찾아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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