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을 군에 넘긴 서울대·고대... 심층조사해 볼 작정입니다 [민병래의 사수만보]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편집자말>
[글쓴이: 민병래(작가)]
"자살인가요? 타살인가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이지원 조사관은 지난 4월 15일, 국군 제5사단에서 1983년에 의문사한 이윤성의 누님과 짧은 통화를 나눴다. 이지원은 1년 안팎 이윤성 사건에 매달려 이윤성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사망했다, 국가는 사과하고 피해 복구 조처를 해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조사보고서를 썼다. 이날 열린 진실화해위 제105차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이지원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누님에게 연락을 했으나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해 답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보니 유족의 응어리를 제대로 풀어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성균관대 사학과 81학번 이윤성은 1982년 11월 3일, '학생의 날'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11월 6일,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군대로 끌려갔다. 이윤성은 2대 독자이고 아버지가 예순을 넘어 보충역 대상이나,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을 두려워하여 '요주의'라고 찍은 학생을 무조건 전방부대로 밀어넣었다. 현역 입영대상이건 아니건 신경 쓰지 않았다. 보안사는 붙잡아 온 학생을 대상으로 활동 사항을 조사하고 프락치 노릇까지 강요했다. 휴가를 보내 입대 전에 활동한 조직의 정보를 빼오도록 했다. 보안사는 이를 '녹화사업'이라 불렀다.
이윤성도 A급으로 분류된 지라 1983년 4월 30일 자대에서 205보안부대로 연행되었다. 그는 조사를 받던 중, 5월 4일 부대 내 테니스장 심판대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되었다. 제대를 불과 8일 앞둔 시점이었다. 유족은 당연히 보안부대의 고문 때문에 죽었는데 자살로 꾸민 게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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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집으로 끌려가 숨진 이들. 왼쪽 위부터 김두황(고려대 80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김용권(서울대 83학번), 이진래(서울대 77학번), 최우혁(서울대 84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정성희(연세대 81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
ⓒ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
마음과 달리 벽이 높았다. 부검의가 남긴 보고서, 법의학자의 의견서는 타살의 흔적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40여 년 전 이윤성을 담당한 205보안부대 대공수사관 박○○은 출석을 거부했고 김○○는 나오기는 했으나 가혹 행위를 부인했다. 수사권이 없으니 박○○와 김○○에 대해 체포나 수색영장을 청구할 수 없었다. 또 방첩사(옛 보안사)를 여러 번 방문해 이윤성이 의문사하기 직전 4일간 수사한 보존자료를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문서인데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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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화해위 2기 조사관 이지원 그는 강제징집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을 담당했다. |
ⓒ 민병래 |
이지원은 진실화해위 2기가 출발하던 2021년, 별정직 공무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그는 오랫동안 대학 언저리에 있었다. 사회학을 전공으로 택해 박사과정까지 밟고 10여 년 강의도 했다.
이지원이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른 건, 2004년 중앙대에 입학해 학부와 대학원에서 언론 활동을 하면서다. 특히 <대학원신문> 편집장을 하던 2009년은 두산이 중앙대를 인수하던 무렵이었다. 흔히 "2009년 12월 29일의 습격"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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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4월 8일 오전 중앙대학교 학생 2명이 한강대교 남단 첫번째 아치에 올라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1시간 가량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
ⓒ 권우성 |
이지원은 2009년에 쌍용차 노동자 2,646명이 정리해고를 당한 일, 2011년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올라야 했던 일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나의 아픔이고 우리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시나브로 두산은 학교를 장악했다. 두산의 힘으로 학교 순위도 올라가고 취업에도 도움되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체념도 퍼져갔다. 하위 5%는 무조건 D학점을 받는 현실, 강의실의 모든 학우가 적이 되고 문학·역사·철학이 죽어가며 캠퍼스가 메마른 들판이 되는 현실을 바라봐야 했다.
그런 가운데 이지원은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나온 대자보와 의견문을 모은 '구조조정 자료집'의 제작에 참여했다.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다음 싸움에 대비한다는 마음으로 이 작업의 실무를 도맡았다.
한편 그는 '사회학' 공부에 매진했다. 박사과정을 밟으며 강단에도 섰다. '현대사회의 쟁점', '사회변동과 발전'을 강의하며 '레드컴플렉스, 발전주의, 신자유주의'라는 의제를 뽑아 수업안을 만들었다. 뜨거운 주제이니 전두환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학생의 여러 반론도 접했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세월을 대학에서 지내다가 이지원은 진실화해위 2기 출범 소식을 들었다. 이지원은 과거사의 아픔을 현장에서 만나보고 싶었다. 강단에서 학생과 나눴던 우리 현대사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언론 활동과 사회학 공부를 통해 다진 역사의식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진실규명 작업을 하는 데 잘 쓰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았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땐 잠시 갈등도 했다. 박사논문, 박사학위가 별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오랜 공부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기에 망설여졌다. 이지원은 진실화해위 경험이 살아있는 논문을 쓰는 데 보탬이 되리라 마음을 정리하고 2021년 5월 출근을 시작했다.
첫 사건은 삼청교육대
이지원이 처음 맡은 사건은 '삼청교육대'였다. 이 사건은 전두환이 1980년 8월 4일 계엄포고 제13호를 근거로 자행한 만행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 벌인 학살극을 흐리게 하려고 '사회정화'를 내세워 '불량배' 혹은 '재범의 우려'가 있다고 의심되는 3만 9742명을 붙잡아 군에 감금했다. 잡힌 사람 중 35.9%는 아예 전과가 없었으니 재범이 염려된다는 말은 애당초 헛소리였다. 이처럼 기준이 엉터리니 연행과정도 황당했다. 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른다고, 음식점에서 소리를 질렀다고 마구 끌고 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내린 지침은 2만 명을 연행하라는 것인데 일선 경찰은 실적 경쟁을 하느라 6만 명 가까이 끌고 갔으니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이들은 교육대라 이름 붙인 군부대에서 두들겨 맞고 강제노동에 피 흘리고 사회보호법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감호시설에 갇혔다.
이지원의 기본업무는 진실규명 신청을 한 피해자의 신상카드를 정리하고 진술을 듣는 일이었다. 마주하기 어려운 증언이 많았다. 몸이 아파 강제노역을 하루만 쉬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가 걷어차여 내장이 터져 죽은 사연, 얼굴을 수없이 얻어맞아 이빨이 다 빠져 20대의 나이에 틀니를 한 사연, 모두 가슴이 아팠다. 또 광주 학살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이 밤마다 술을 먹고 내무반에 들어와 대검을 빼 위협하고 교육생을 장난감 다루듯 두들겨 팬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욱 마음이 아팠던 건, 진술이 끝나고 도장을 받을 때였다. 몇몇 피해자는 자신의 증언이 제대로 담겼는지 확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글을 몰라서였다. 이지원은 천천히 읽어주며 함께 검토했다. 문득 이 피해자는 진실화해위 사무실을 어떻게 찾아왔을까? 신청서류는 누가 써준 걸까? 교육대 사건 이후 모진 세월을 어찌 살아왔을까? 가슴 시린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삼청 이후 맡게 된 강제징집 사건 피해자를 만나서도 마음 고생이 있었다. 보안대의 소환을 앞두고 자신과 동지를 지켜낼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시도하다 시력을 잃은 사람, 휴가를 나가 복귀하지 않고 2년을 숨어다니다 끝내 잡혀 고통 받은 사람, 대검으로 고문 받았을 때의 서늘함이 지금도 자신을 괴롭힌다는사람, 사연은 다양했다. 이런 아픔을 진술하다 어떤 피해자는 감정이 북받쳐 자신의 조카뻘 같은 이지원 앞에서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이지원은 그 아픔에 공감하면서 내가 이 울먹임을 지켜봐도 되나, 볼 자격은 있는 건가 자신에게 묻기도 했다.
다행히 삼청교육대와 강제징집 사건 모두 "국가폭력이고 대규모 인권침해다"라고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삼청은 조사 개시 시점에 대법원에서 삼청의 실시근거인 계엄포고령 13호가 위헌이라고 판결한 덕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강제징집 사건도 국가기록원에서 건네받은 보안사의 사찰기록,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국방부 과거사규명위원회에서 확보한 자료, 신청자 482명의 진술이 쌓여 결정에 어려움이 없었다. 이윤성과 마찬가지로 군에서 의문사 한 한희철·김두황·김용권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도 이뤄졌으니 지난 4년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애로도 있었다. 충분한 개인별 조사를 하기엔 맡은 사건 수가 많았다. 2차 단체신청부터 강제징집을 맡았지만 5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신청했고 삼청교육대도 백여 명이 넘었다. 직접 진술을 듣는다는 원칙을 세웠기에 진실화해위로 오기 어려운 사람은 찾아가 증언을 들었다. 지방출장도 가야하니 시간이 빠듯했다. 초보 때는 진술 후에 받아야 하는 도장을 빠트려 다시 가기도 했다.
자료가 없는 경우가 제일 난감했다. 특히 삼청교육대는 길거리에서 마구잡이로 끌고 간 데다 치안본부가 연행 명부를 없앤 바람에 기록이 없는 피해자가 많았다. 이럴 땐 목격자를 찾아야 한다. 중요한 증언을 해줄 참고인마저 없으면 안타깝게도 불능 처리를 할 수밖에 없다. 신청인을 대하기가 정말 송구한 경우다. 결정서를 쓰는 일도 그렇다. 명색이 진실화해위 보고서라면 진실규명의 의의가 충분히 담겨야 하나, 행정은 간결함과 형식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서류 양식에 맞춰 결정문을 쓰노라면 역사의 아픔이 납작해지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곤 했다. 무엇보다 답답한 건, 가해기관이라는 벽이었다. 수사기관, 정보기관 출신의 가해 혐의자는 몇 년짜리 조사관을 얕잡아 보았다. 이윤성 사건을 조사할 때 가장 절실히 느낀 장벽이었다.
진화위 조사관으로서 품게 된 질문
2기 4년을 마무리 하면서 이지원은 과거사 조사관으로서 사회학도로서 여러 질문을 지니게 되었다. 우선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나? 라는 의문이다. 아직도 구제 받지 못한 피해자가 수없이 많은데 신청주의라는 원칙 때문에 자료상에서 뻔히 확인되는 피해자를 방치하면서 민주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안타까웠다. 또 하나는 과거사의 기준 문제다. 피해자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증언을 남기며 흘리는 눈물은 이 고통이 바로 오늘의 일이고 죽음이 닥쳐야 벗어날 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거사라고만 해도 되는 건지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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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화해위 2기 조사관 이지원 그는 강제징집과 삼청교육대사건을 맡았다. |
ⓒ 민병래 |
진실화해위2기는 올해 11월 활동이 끝난다. 이재명 대통령은 조속한 3기 출범을 약속했다. 현재 3기에 대해서 많은 상상력이 오간다. 용혜인 의원이 발의한 전부개정안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김광동이나 박선영 같은 극우인사가 진실화해위를 쥐락펴락 못 하게 국회가 탄핵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위원회에 압수·수색영장 청구와 수사 의뢰 권한을 부여하며, 자료요구권을 충분히 보장한다는 안이다.
방향이 좋다. 피해자나 시민단체는 이에 공감하면서 다른 희망도 얘기한다. 서울시 공무원이던 유우성이 국정원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고통 받은 게 2013년이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숨진 게 2015년이다. 그런가 하면 기무사가 세월호 유족까지 사찰한 것이 2014년이다. 정권은 민주 절차로 교체되어도 분단 반공 국가를 떠받치던 정보수사기관의 관행이 여전히 진행 중이고 진행될 수 있기에, 국가인권위처럼 상설기구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들린다.
또 수사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가 활동을 끝내면서 정호영·최세창 등 학살의 혐의가 뚜렷한 사람을 집단살해죄로 2024년 6월 대검에 고발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40여 년 전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질 때 전두환 반란 세력과 검찰은 한통속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진실화해위내에 수사 부서가 있다면 과거사 사건이 지닌 의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명 의식을 다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실규명은 훨씬 탄력을 받을 수 있고 가해자를 규명하는 일도 속도를 높일 수 있을 터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헌법을 고쳐 검찰만이 영장을 청구하는 제도를 손 보겠다고 했다. 또 국가폭력 사건의 공소시효를 폐지한다는 약속도 했다.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국가기구가 전문 수사영역을 가지는 게 국민의 이익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새정부 출범을 계기로 수사 권한을 갖는 과거사 기구를 꿈꾼다.
3기에서도 잘 쓰이고 싶은 이지원의 꿈
한편 이지원을 비롯해 160명에 이르는 진실화해위2기 조사관도 3기에 관해 여러 문제 의식을 모으고 있다. 전국공무원노조 진실화해위지부와 직장협의회가 수렴하는 의견 중 주목되는 것은 "가해자의 이름을 발표하는 문제"다. 현재 진실화해위 내부 방침은 범죄기관의 장·차관이나 사령관 수준은 공개하되 실무급 가해자에 대해서는 개인정보보호법을 고려해 실명을 가리라는 것이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결국 일선에서 고문행위를 한 범죄자를 보호한다는 지침이다.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을 펴내면서 '사자명예훼손 소송' 등 온갖 어려움에 당당히 맞섰건만 명색이 국가기구인 진실화해위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면 기획하고 집행한 가해선상에 누가 있었는지는 밝혀야 하다. 이것이 정의가 있는 과거사 해결이다. 2기 동안 세 명의 위원장이 있었으나 조사대상자의 보호에만 신경쓸 뿐 이 장벽을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3기에서는 진실화해위의 기풍이나 제도 차원에서 이를 넘어서야 조사관이 더 책무감을 갖고 뛸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또 직권조사를 늘리고 진실규명 결정과 배·보상이 한꺼번에 이뤄지게끔 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인사가 위원회에 아예 들어오지 못 하게 하자는 등 여러 제안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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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집으로 군에 끌려가 사망한 고려대생 김두황(왼쪽에서 두번째) |
ⓒ 김두황추모사업회제공 |
이재명 정부의 공약대로라면 진실화해위3기는 2025년 12월에는 출발한다. 3기에는 얼마나 많은 역사의 아픔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까? 이지원 조사관이 3기에도 쓰인다면 '강제징집, 전향·프락치 강요' 공작의 전모는 남김없이 실체가 드러날까? 12월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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