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다산의 숨결을 따라 걷는 길
[문운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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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 유적지 정문 (실학연수)/실학사상이 담긴 못과 늪이라는 뜻 |
| ⓒ 문운주 |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년 6월 16일 ~ 1836년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정치가, 학자, 문신 그리고 개혁가다. 그는 조선의 사회·정치 제도를 비판하고 실용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한 인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을 이룬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정약용의 가족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큰 희생을 겪었다. 셋째 형 정약종은 물론, 형수와 매형 이승훈, 조카들까지 한꺼번에 참수형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정약용 자신도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그 유배지는 바로 전라남도 강진이었다.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가족을 잃은 충격과 절망 속에서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러나 점차 마음을 추스르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갈고닦았고, 마침내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된다. 절망의 땅이 오히려 위대한 사상가로 다시 태어나는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의 배를 자기 배처럼 여기고, 백성의 병을 자기 병처럼 여겨야 한다.
청렴은 목민관의 근본이요, 모든 선(善)의 으뜸이다.
백성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목민심서 중]
관리의 기본은 백성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 즉 애민(愛民)에 있다고 가르친다. 공직자의 청렴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다. 정약용은 목민관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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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유적지 조형물 ‘꺼지지 않는 불’ |
|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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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 유적지 다산기념관 |
|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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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유적지 여유당, 묘소 |
| ⓒ 문운주 |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擧重機)는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계로, 수원 화성 축성에 활용되었다. 이 장치는 적은 인력으로도 큰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어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거중기는 단순한 발명을 넘어, 백성을 위한 실용적 기술을 추구한 정약용의 실학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성과다.
정문을 지나 좌측으로 다산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정갈하게 꾸며진 공간이다. 전시된 유물과 자료들은 다산의 사상과 정신을 생생하게 전하며, 그의 치열하고 깊이 있는 삶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기념관으로 들어서자 정약용의 삶이 차분하게 펼쳐졌다. 목민관으로서의 청렴한 정신, 수많은 저술들, 백성을 위한 실용기구 설계까지. 책으로만 접했던 그의 진면목을 직접 마주하니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실학이 단지 지식이 아닌 실천의 학문임을 새삼 깨닫는다.
정약용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마재마을을 떠나 정조가 승하했을 때 고향에 돌아와 사랑채에 '여유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겨울 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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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중기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계. 화성 축성에 활용 |
|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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