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뛰쳐나온 47만여 명의 학생들... 이 역사는 왜 잊혔나

조한진희 2025. 6. 1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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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진영은 '고운 세대'에게 응답할 수 있을까?

[조한진희]

역사는 선별적으로 기억된다. 1989년 전교조가 출범하고 교사 1500여 명이 해직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해 약 47만여 명의 중고생이 전교조 교사 해고에 맞서 방학거부, 점거농성, 단식투쟁, 거리시위를 했다는 것을 사회는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와 교육 당국으로부터 탄압과 괴롭힘, 징계를 당하고 일부는 구속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구 경화여고에 재학 중이던 김수경은 학생회와 전교조 지지 활동을 이유로 학교로부터 탄압을 겪다가, 유서를 남기고 영남대 옥상에서 투신했다.

한편 1980년대나 90년대 초반까지 대학에서 운동을 하다가 공장으로 들어간 '학출'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고등학생운동(고운)을 하다가 민중과 함께 세상을 변혁하겠다며 공장으로 들어간 소위 '고출'(고운 출신)들이 있다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 김철수열사추모제 참교육의 불꽃 김철수열사 추모제
ⓒ 김철수열사추모사업회
그리고 1991년 5월투쟁 정국에서 전남보성고에 재학중이며 고운을 하던 김철수는 비인간적 교육제도를 비판하며 분신했고,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분신 한 학생 열사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도 모두 고등학생운동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력은 사회적으로 거의 회자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994년 '주사파색출'이라는 공안 정국 속에서 '조직사건'이 터지며 탄압 당한 수많은 이들 중에, 고운활동가들도 있었다는 것 역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고운(고등학생운동)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는데, 학교 민주화와 교육 민주화를 요구하며 입시 위주의 비인간적 교육을 거부했다. 사학비리척결과 성폭력·성차별 없는 학교를 만들고자 했고, 전교조가 참교육을 견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전교조 사수를 주요한 투쟁으로 가져갔다. 직선제 학생회를 쟁취하고 자주적(자율적)학생회를 건설하고, 보충 자율학습 폐지와 체벌금지를 요구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학살자 전두환 처벌!"을 외치고, 서로를 조직해서 점점 더 많이 거리로 나와 "노태우를 당선 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고 요구하고, "김영삼 퇴진!"을 외쳤다. 그들은 10대가 일어나면 세상을 변혁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었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

이런 역사가 왜 거의 기억되지 않았을까? 고운을 했던 이들은 대체로 수 십년 간 묻어두고 지냈다. 소환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 성과를 내지 못한 운동이라는 좌절감, 살아남았다는 미안함이 한 켠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자긍심으로 기억하더라도, 80년대 '대학생운동'을 했던 일부 세력들이 민주화 역사를 독점하는 태도에 질려서 침묵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뿐일까? 고운의 역사가 사회적으로 거의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은 이유 말이다. 10대는 학교와 교육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로 훈육되길 기대 받는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학교나 사회 전반은 말할 것도 없고, 운동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10대들이 광장에 서면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데모질하러 나왔냐"며, 투쟁은 대학 간 다음에 하라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러니 정치적 10대는 어디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불온한 존재였고, 사회적으로 이들의 투쟁을 기억하거나 기록할 이유가 없었다.
▲ 참교육선봉중고생 1990년대 초반 노동자대회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대오
ⓒ KSCM
그리고 안타깝게도 고운과 가장 가까운 '동지적 관계'에 있던 전교조조차 고운을 잊었던 것 같다. 전교조 출범 초기는 정권의 폭압에 맞서 해직 교사들의 복직 투쟁을 하느라,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는 또 그때의 현안들로 바빴다. 그래서 전교조 교사를 해직시키는 학교와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퇴학을 비롯해서 징계를 당했던 학생들도 그리고 고운도 기억하지 않았다. 전교조도 탄압에 맞서고 산적한 투쟁 사안에 대응하느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또 한편 전교조 역시 교육 민주화 운동과 전교조 사수 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로 기억하기 보다는 선생님을 존경했던 '어린제자'로만 기억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정서가 이따금 사회적으로 고운이 언급 되더라도 전교조 부산물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고착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4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나 고등학생운동을 기록한 책이 출간되었다. 나는 고운의 마지막 세대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자책감과 책임감 위에서 이 책을 기획했다. 책을 준비하며 다양한 고운활동가들을 만났다. 처음 보는 낯선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희끗한 머리와 주름진 50대 얼굴 사이로 10대 시절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고운을 신기루 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하거나, 다들 어렵게 잊고 사는데 고통을 헤집지 말라며 호통치는 이도 있었다. 고운을 기록하는 것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드러내며, 우리가 사회적으로 기록되거나 기억되기 위해서 운동한 게 아니었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고운을 혼돈과 상처로 기억하고 있고 30년 가까이 거의 입밖에 꺼내지 않으며 살아왔던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시절을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이들이 있었고, 고운을 기록하는 게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마음으로 11명이 함께 <고등학생운동사>를 썼다.
▲ 고등학생운동사 고등학생운동사(동녘,2025) 책표지
ⓒ 동녘
책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깎여 나가고 좌절하고 그럼에도 집요하게 조금은 세상을 바꿔낸 삶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역사는 어떻게 전진 혹은 후퇴하는지, 사회변화의 동력은 무언이고 어떤 조건에서 질적으로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획자로서 나는 애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갖지 않으며 투쟁했던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이 책을 기획했다. 개인의 유배된 기억을 넘어서 사회적 기록으로 만들면서 당시의 고운이 한국 사회에 무엇이었는지 묻고자 했다. 즉 고운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성찰과 토론, 비판적이고 객관적 평가가 이어지길 바랐다. 이를 통해 역사와 운동의 전망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함께 만들어 가고 싶었다. 그리고 고운을 하다가 트라우마를 갖게 되거나, 열사가 되거나, 열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지만 세상을 떠난 이들, 여전히 과거의 혼돈에 갇혀있는 동지들의 삶과 죽음이 조금 이나마 제자리를 찾게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치열한 투쟁이 좌절과 트라우마로 남았을 때

고운 이후, 30년 넘게 늘 생각하는 게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진심과 치열하게 투쟁한 결과가 때로 상처와 고통 혹은 질병이나 죽음으로 남는 현실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자주 골몰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주제로 토론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2019년에는 '활동가 건강권 포럼'을 제안하고 기획해서 진행했었다. 여성·노동·빈곤·장애를 비롯한 여러 운동 영역의 활동가들을 섭외해서, 활동가들이 아프게 되고 좌절하게 되는 현실을 성찰하는 발표로 구성했다. 운동 사회 안팎에서 관심은 뜨거웠고 포럼 이후에도 여러 활동이 이어졌다. 당시 포럼을 제안하고 기획했던 것은 영상운동집단 '다큐인'에서 오랫동안 함께해 온 동료이자, 당시 416미디어위원장이던 박종필의 급작스런 죽음이 직접적 계기였다.
▲ <포럼: 사회운동활동가의 건강권을 묻다> 2019년 개최한 <포럼: 사회운동활동가건강권을 묻다> 행사 사진
ⓒ 박종필추모사업회
하지만 더 깊게는 고운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나조차 고운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던 때라, 해당 포럼에서 관련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운 이후 앓거나 떠돌며 삶의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거나, 깊은 우울증 속에서 세상을 떠난 '옛동지'들에 대한 짓눌림이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 포럼에서도 활동가의 삶과 투쟁, 건강과 안전망 등에 관한 운동사회의 구조적 성찰 그리고 변화에 대해 논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연결해서 고등학생운동을 기록하기로 마음먹게 된 배경에는 옛동지들과 함께 이제 그만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도 컸다. 물론 고운을 자신들의 전사(前史)로 설정한 청소년인권운동진영에 비판적 유산으로 이어 내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 '386세대' 혹은 '86세대'가 독점한 민주화 서사에 균열을 만들며, 우리 사회 민주화는 고운을 비롯한 여러 민중들이 함께 밀어온 역사의 수레바퀴였음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도 큰 이유였다.

응답하라, 운동사회

사회운동진영 혹은 운동사회를 일종의 생태계를 지닌 공동체라고 한다면, 운동사회가 '응답' 할 수 있을까? 고운세대들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 자신의 삶과 투쟁에 관해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운동사회만이라도 고운을 함께 기억하고 호명하는 것,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 고운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토론 해 볼 수 있을까. 이는 고운을 사회적으로 의미화 하는 과정이고, 이게 바로 고운을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의 사회적 회복에도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또 한편 고운이 소멸한 원인을 두고,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흔히 설명해 왔다. 하지만 이뿐 아니라 고운을 계급투쟁을 위한 공장 활동의 배출구로 보거나, 활동가의 조기교육과 생산기지로 상정하거나, 정파의 세력 확장 도구로 고운에 접근했던 조직들의 영향도 분명 있었다. 섣부르게 운동에 개입하고, 거칠게 조직하다가 무책임하게 떠난 사례들이 남긴 영향과 타격도 일부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은 고운의 생명력이나 조직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즉 고운의 소멸 원인에는 운동 사회가 가진 한계나 모순도 존재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현재에도 유효할 것이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 위에서 발 딛고 있고, 지나간 오류를 직면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반복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운은 소멸했고, 많은 고운 활동가들은 아무런 성과를 남기지 못한 운동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자괴감에서 나온 것이고, 그대로 사실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고운의 의미와 성과에 대해서도 운동사회에서 함께 토론해 볼 수 있을까.
▲ 고운 출신 노동자가 많았던 갑일전자 노래패 힘찬울림 공연사진 고운을 마친 이후 공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고, 90년대 초반 구로공단 공장에는 많은 고운 출신 노동자가 있었다
ⓒ 권정기
'고등학생운동사' 책의 11명의 필진 중, 극히 일부는 고운을 삶의 빛나던 시절로 설명한다. 전 민노당과 정의당 당직자였던 이형신은 고운 시절 그려둔 삶의 각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고, 그 당시 다져놓은 단단한 근육으로 지금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인 김소연은 정화여상 재학시절 사학비리척결 투쟁을 했던 경험이, 이후 갑을전자나 기륭전자 투쟁을 전개할 때 원형 같던 힘이라고 말한다.

운동 사회가 함께 고운을 기억하고 호명하고 의미화 한다면, 다른 많은 고운 활동가들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 저들처럼 반짝이던 투쟁 경험으로 서술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게 사회적 치유이고, 연대이며, 책임이라고 보고 있다. 고운을 했던 이들이 좌절의 기억 속 트라우마에 갇혀있는 한, 고운 역사도 계속 어두운 역사로 현재 진행형 일 수 밖에 없다. 운동 사회가 공동체성을 발휘한다면, 유배 시켰던 개인의 고립된 기억이자 '미완의 운동'으로 남아 버린 고운의 역사가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조한진희님은 <고등학생운동사> 기획자이자 공저자이며, 다른몸들 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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