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약을 너무 믿기도 하고, 너무 무서워하기도 해요"

김예리 2025. 6. 1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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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두 얼굴의 약... <스테로이드 인류> 저자 백승만 교수 인터뷰

[김예리 기자]

이전에 학교에서 약을 공부했다. 약학 대학에서 공부하는 내용을 설명하자면 약이 몸에서 작용하는 과정, 화합물의 구조와 화학식, 약물의 제제와 계산과 환자 상담 실습 등이 있다. 듣기에는 꽤나 딱딱하고 재미없게만 보이는 내용이다.

각종 실습 준비와 실험, 시험 준비로 지쳐가던 때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쉬는 방법이 있을까?'라는, 꾀가 가득한 생각을 했다. 평소 책 읽는 것을 즐겨하니, 공부하는 분야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공부도 하고 취미도 즐기고, 일석이조인 셈이다.

약을 다루는 책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분자 조각가들〉을 접했다. 책에서 저자는 약을 만드는 과학자를 마치 분자를 조각하는 사람 같다 하여 '분자 조각가'로 칭한다. 책은 다양한 약물의 발견 역사와 개발 과정을 흥미진진하고 숨가쁘게 전달한다.

학교에서 단순히 나열된 정보만을 반복해서 공부하다가, 이야기가 합쳐진 글을 읽으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밝혀진 내용이고,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뒷이야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임산부 약으로 판매돼 전세계 1만 명 이상의 기형아가 나오게 된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이야기로 접하니, 새삼 임상 시험과 의약품 규제의 중요성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기자 교육을 받는 지금, 인터뷰 과제가 주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은 어려웠던 공부에 한 줄기 '재미'를 심어준 과학 스토리텔러 백승만 교수였다. 나는 그저 저자의 열렬한 팬이었을 뿐, 따로 연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과학을 재미있게 전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물리나 생명과학, 화학 등을 쉽게 설명하는 유튜브 채널도, 과학자 출신 방송인과 작가도 있다. 하지만 '약'을 깊이 있게 풀어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은 백 교수 외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스테로이드의 두 얼굴... "완벽하지 않기에 더 잘 알 필요가 있어요"

약은 우리 일상과 늘 함께하지만 깊이 파고들면 생소하고 흥미로운 부분도 많다. 이 재미와 경각심을 함께 전하는 저자가 궁금했다. 마침 신간이 나와 책의 내용과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비록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메일을 넣어 인터뷰를 부탁했다.

그렇게 보낸 인터뷰 요청 메일에 백 교수는 흔쾌히 응했다. 지난달 1일, 그를 줌 비대면으로 만나 신간 <스테로이드 인류>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눴다(2025년 3월 출간).
 <스테로이드 인류> 저자 백승만 경상국립대 약학대학 교수
ⓒ 백승만
"약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 잘 알아야 해요."

'근육을 키워주는 약'으로 불리는 스테로이드의 불법 유통과 오남용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단기간에 몸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10대 청소년까지 약물에 손을 대는가 하면, 일부 트레이너와 유튜버는 무분별하게 스테로이드 복용을 권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 몇 년간 SNS 등 온라인을 통한 스테로이드 불법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2023년에는 스테로이드 주사제 약 2만4000개가 200여 명에게 판매된 적발 사례도 있다.

스테로이드는 정말 위험하기만 할까, 아니면 꼭 필요한 약일까?

도핑, 피임약, 연고, 근육 주사, 그리고 염증 치료제까지. 스테로이드는 어느새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왔다. 그만큼 오해도 깊다. '근육을 키워주는 약', '위험한 약', '기적의 치료제' 등 다양한 얼굴로 알려져 있다.

어떤 약은 치열한 연구 끝에 태어나고, 어떤 약은 우연히 발견된다. 그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정 속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책 <스테로이드 인류>는 바로 그 사람들, 곧 약을 만든 이들, 복용한 이들, 그리고 그 약이 필요했던 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책의 저자인 백 교수는 인터뷰에서 과학자의 정제된 언어와 스토리텔러의 유창함을 오가며 약의 세계를 들려주었다. '과학적 설명' 대신 '이야기'를 꺼내 든 그는 스테로이드를 둘러싼 수많은 오해와 실패, 시대적 수요와 사회적 배경을 차근히 되짚는다.

<스테로이드 인류> , 약은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
 <스테로이드 인류>
ⓒ 히포크라테스
책은 스테로이드라는 하나의 계열에 속한 약물들을 둘러싼 과학, 역사, 사회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책이다.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코르티손, 프로게스테론 같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물질들이 어떻게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백 교수는 타고난 이야기꾼의 감각으로 풀어낸다.

19세기 말, 브라운-세카르가 개의 고환 추출액을 자신에게 주사한 실험으로 내용이 시작된다. 남성의 활력을 되찾으려는 이 시도는 훗날 스테로이드 호르몬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후 테스토스테론의 발견과 함께 스테로이드는 다양한 효능으로 주목받으며 '21세기의 기적'이라 불리지만, 도핑과 피임, 화학적 거세 등에 사용되며 사회적 논란도 불러일으킨다.

책의 부제 '기적과 죽음의 연대기'는 이러한 스테로이드의 두 얼굴—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역사—를 상징한다.

"약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복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소통하는 것은 필연적이에요.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거든요"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피임이 불법이었다. 여성의 몸과 출산은 엄격한 통제 아래 있었다. 여성들의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한 산아제한 운동가 마거릿 생어, 여성 참정권 운동가 캐서린 매코믹, 과학자 그레고리 핑커스는 협력해 피임약 개발에 나섰다. 이 대목은 약의 탄생이 과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변화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약은 언제, 어떤 맥락에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함께 들여다볼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적 발견과 사회적 합의, 시대적 요구가 맞물려야 약이 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흥미롭고도 섬세하게 풀어낸다.

과학자에서 스토리텔러로, '약'을 말하게 된 이유

"약은 정말 어렵습니다. 훌륭한 연구자도 약 하나 만들기 힘들어요. 그런데 주변에는 약이 너무 많잖아요. 저는 그게 늘 신기했어요."

연구실에서 분자 구조를 다듬던 백 교수의 일상은, 어느 순간 대학 강의실을 나서 강연장과 서점의 책장으로 이어졌다. 약을 다루는 사람에서, 이야기꾼으로 역할 하나가 추가된 것이다.

"사람들은 약을 너무 믿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무서워하기도 해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약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사명감의 배경에는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었다. 박사과정 시절 그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니 힘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훗날 그것이 근육 생성이나 에너지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염증 치료용 스테로이드였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깨달았어요. 저처럼 약을 전공한 사람도 헷갈릴 수 있다면, 일반인들은 더 모를 수밖에 없겠구나."

그는 약의 기원과 개발의 서사를 전공 수업 밖으로 끌어냈다. 단순한 효능과 용법 설명 대신, 약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우연과 시행착오, 그 속에 깃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접근을 하게 된 계기는 작가 김영하의 강연에서 듣게 된 한마디였다.

"스토리텔링이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이 집중하기 시작해요."

그 후, 마냥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약이 사람의 이야기와 연결되면 살아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단순한 의약품 개발 이야기는 재미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사람 이야기를 담으면 생생하게 살아나죠."

이런 철학을 담아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대마약시대>, <분자 조각가들>을 거쳐 최근의 <스테로이드 인류>까지, 백 교수의 저서들은 모두 과학을 넘어서 인간과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아왔다.

"다음에는 조금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요. 이를테면 약과 예술처럼요. 사실 약 관련해서 이것저것 공부하다보면 필요한 내용, 주 내용은 강의로 다루기도 하고 책을 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뒷이야기들은 따로 모아서 써도 좋겠다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전쟁', '마약'과 같이 인간의 욕망과 충돌이 얽힌 무거운 주제들 속에서 약의 역사를 말해온 그는 다음에는 예술의 관점에서 약을 바라보는 서사를 구상 중이다.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의 경계에서 그의 약 이야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줌으로 인터뷰에 응한 백승만 교수
ⓒ 김예리
<스테로이드 인류>를 통해 독자들에게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약 만드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것. 그 과정에서 과학자들도 인간적인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는다는 점. 약은 전문가의 가이드라인대로 복용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스테로이드에 관한 불필요한 오해를 걷어내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처방전으로 관리되면서 스테로이드는 굉장히 안전한 약이 됐어요. 아플 땐 약을 복용하는 게 맞아요. 약을 맹신해 오남용하면 안 되지만, 처방전이 나오고 복약지도를 받았는데도 너무 우려해 약을 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스테로이드 인류>는 약이 단지 몸속에서 작용하는 화학 물질이 아니라 시대와 사람, 그리고 사회적 맥락의 복합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약을 둘러싼 오해를 걷어내고, 한 걸음 더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나 역시 약을 공부하면서 '어렵고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오래 안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약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도 인간적인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약에 국한되지 않고, 무언가를 알아갈 때 때로는 설명보다 서사가 먼저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나 역시 백 교수의 책을 통해 그런 재미를 알아갔듯이,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이해의 경험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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