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없어졌을 때, 극장은 우리의 삶이었어요"

이규승 2025. 6. 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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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예술가 안내원' 졸업하는 문병재, 김영훈, 남기용 배우들

[이규승 기자]

"이제는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관객을 만나고 싶어요."

이 말은 4년간 극장을 지켜온 '예술가 안내원' 세 명이 남긴 마지막 인사이자, 앞으로 무대를 향해 나아갈 다짐이다.

고요한 햇살이 비추는 지난 5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의 로비에서 이들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어쩌면 이 순간은 삶이라는 무대에서 잠시 객석을 지키던 이들이 다시 조명을 향해 걸어 나가는 찰나였다. 각자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배우 셋이 한자리에 마주 앉았다. 무대 뒤에서 극장을 지켜온 손길들, 그들이 비로소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대 위 세 배우가 안내원으로 지낸 4년
 대학로의 이른 오후, 극장 로비 한 켠. 햇살이 길게 드리운 테이블에 세 배우가 나란히 앉았다. 이들은 모두 4년 넘게 ‘공연예술인 관객안내원’으로 근무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학로의 이른 오후, 극장 로비 한 켠. 햇살이 길게 드리운 테이블에 배우 셋이 나란히 앉았다. 문병재(연출·배우) 김영훈(배우), 남기용(배우). 모두 4년 넘게 '공연예술인 관객안내원'으로 근무한 이들이다. 오늘은 안내원이 아닌 서로의 동료이자 배우로, 동반자로 마주했다. 가장 먼저 김영훈이 말문을 열었다.

"공연이 없을 땐 늘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어요. 그런데 안내원 일은 달랐어요. 매일 극장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술을 계속하고 있다는 감각을 놓지 않게 해줬죠."

극단 지금이때 소속 배우로 창작극에 몰두해온 그는 지금 대학로에서 오픈런 연극에 출연 중이다.

문병재는 극장을 '기대되는 일터'라고 표현했다. 한때 무대에 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을 지나, 그는 이제 관객의 숨결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자리에서 예술의 숨은 결을 읽었다. 최근 자신의 경쟁심을 주제로 연극 <경쟁뎐>을 준비중인 그는 극장에서의 시간은 창작자로서의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공연을 만들고 무대에 올릴 때, 자연스럽게 관객을 안내하는 것까지도 공연의 일부죠. 안내원이 된 이후로는 관객의 리듬, 공연장 분위기까지 연출에 반영하게 되었어요."

즉흥연극팀 'FUNPROV'에서 활동 중인 남기용은 극장에서 배우는 감각을 무대 위에서 되살리려한다며 "즉흥연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대응력, 관객과의 호흡이 중요한데, 안내원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공연의 분위기는 관객과의 첫 마주침에서 시작돼요. 안내원이란 위치가 그 시작을 만들어내는 거죠"라고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때론 웃음으로, 때론 고요한 공감으로 이어졌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 일이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라 예술의 일부라는 것. 사실 연극예술인의 고단한 삶은 통계에서도 뒷받침한다.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실시한 '청년예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연극 분야 예술인의 월평균 소득은 전체 예술인 평균보다 낮았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예술 외 아르바이트나 부업을 병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작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 사업은 예술가들에게 최소한의 생계 기반이자,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이 되어준 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20년 7월, 코로나19로 인한 공연예술인의 생업 위기를 타개하고자 '공연예술인 관객안내원' 제도를 도입했다. 이후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지금까지 총 32명의 예술인을 선발했다. 평균 근속 기간은 1년 미만이지만, 문병재, 김영훈, 남기용 세 사람은 4년 넘게 근무하며 극장의 얼굴로 자리매김해왔다.

"이 제도는 불규칙한 예술활동 속에서도 스스로 일정을 조율하며 생계를 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어요. 그 덕분에 공연도 보고, 일을 하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죠." (문병재)

"대부분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는 연습과 공연 일정과 충돌해서 결국 그만두게 되는데, 이 제도는 예술인의 현실을 고려해 설계된 점이 특별해요." (남기용)

"공연이 없을 때, 매일 극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돼요. 관객을 맞이하며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는 감정이 살아납니다." (김영훈)

동료의 눈으로 본 '예술가 안내원'
 고요한 햇살이 비추는 지난 5일, 대학로의 아르코예술극장 앞에서 세 배우들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포즈를 취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 사업의 또 다른 성과는 예술가들이 안내원으로서 쌓은 경험이 단지 일자리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연장과 공연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예술인들이 안내를 맡으며 극장 서비스의 질은 향상됐고, 이들은 관객과 예술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안내원 간의 예술적 교류는 활발했다. 서로의 작품에 참여하거나 연출, 출연으로 협업하며 새로운 창작의 장이 열렸다. 한 공연에서 관객을 맞이하던 이들이, 어느새 무대 위에서 서로의 파트너가 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극장 입장에서도 이들과의 관계는 단순 고용을 넘어선 동반자적 성격을 띠었다. 오늘 안내원이었던 이가 내일 무대에 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 제도를 단순한 고용정책이 아닌 예술 생태계 안에서의 지속 가능한 구조로 만들어주었다.

이들의 안내원 활동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는 극장의 하우스매니저인 변고은 과장이다. 그는 이 사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해왔다.

"코로나 때 일자리 만들기 위해 생긴 이 사업은 애초에 예술인이 생활비를 보존하거나 공연예술인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 목적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만 4년 넘게 근무하면서 본업을 병행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만족도가 상당히 높아졌어요. 무엇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예술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예술가들에게 굉장히 큰 의미였죠."

그는 안내원과 예술가 사이에서 생긴 새로운 변화에 주목했다. "문병재 씨가 연출한 작품에서 동료 안내원이 출연 배우로 섭외되기도 했어요. 또한 문병재 씨도 예술극장 작가지원 프로젝트 ⌜봄 작가, 겨울 무대⌟ 낭독공연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과정을 우연히 지켜보며 색다른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날 오후, 로비에는 조용한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던 순간들도,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던 공기마저도 마치 연극의 장면처럼 아로새겨졌다. 셋은 잠시 웃음을 주고받았고, 이어지는 침묵은 공연의 엔딩처럼 아득했다.

"극장은 어떤 면에서 예술가에게도 안식처 같은 곳이에요." 김영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어디론가 가야 할 때,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때, 극장으로 오면 괜찮았어요." 남기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떠나는 게 아니라, 잠시 내려놓는 거죠. 그리고 또 다른 무대를 향해 걷기 위해."

다음 무대를 향해, 기립박수와 함께

그들이 떠난 자리는 이제 또 다른 예술가들의 몫이다. 새롭게 들어설 안내원들이 관객을 맞이하고, 무대를 준비하며, 그 자리를 이어갈 것이다. 이들이 지켜낸 극장, 그들의 감각, 웃음, 배려가 또 다른 연극의 시작점이 된다.

그리고 이제, 문병재, 김영훈, 남기용 세 사람은 '공연예술인 관객안내원'으로서의 여정을 명예롭게 마무리하고, 다시 배우로, 연출가로, 예술가로 본업의 무대로 돌아간다. 그들이 걸어온 여정은 단순히 안내석에서 시작해 무대로 이어진 경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가 일터에서 예술을 발견하고, 동료와 관객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제 안내원의 유니폼을 벗고 무대로 향하는 이들에게, 극장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집이자 출발선이 된다. 그들이 남긴 시간은 공연장을 오가는 수많은 관객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또 다른 예술가의 발걸음을 비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는 조명이 꺼진 후에도 무대를 지키는 또 하나의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대 위에서, 더 자유롭게, 더 창조적으로 관객과 마주하길 바란다. 세 사람의 다음 막을, 박수로 응원한다.
 문병재, 남기용, 김영훈(좌측부터) 배우가 4년의 공연예술인 안내원 활동을 마치고 무대 위로 돌아가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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