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성을 믿고, 수원 화성을 쌓았다고?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이름부터 '禿山(독산)'이라니 본시 민둥산이었을까? 아니면 산성 기능을 극대화하려 수목을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일까? 후자일 개연성이 높다. 혹자는 항아리를 닮아 그리 부른다는데, 내 눈엔 글쎄다. 산성은 독산 꼭대기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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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융건릉-독산성(1872년지방지도_수원부_부분) 화성에서 남쪽으로 융건릉(약 8 km)이 있고, 황구지천을 건너면 독산성(약 4 km)이 자리한다. 화성 장안문~팔달문~안녕으로 이어지는 붉은 실선이 옛 삼남대로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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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건릉과 용주사 독산성 동문 치성에서 바라 본 삼남대로 쪽 모습. 사진 중앙 왼쪽이 융건릉 숲이고, 그 옆 오른쪽 숲에 용주사가 자리한다. 사방이 일망무제다. |
| ⓒ 이영천 |
너른 수원 벌판을 적시는 대여섯 갈래 물줄기를 합쳐 황구지천이 굵어진다. 그 물이 독산의 북에서 서남으로 휘어진다. 천혜의 해자다. 그러했으므로 일찍이 보루였음직한 곳에 산성을 쌓았다. 해발 208m, 평지돌출의 산을 포곡식과 퇴뫼식을 섞어 감쌌다. 급경사 위에 듬직한 성벽이 탄탄해 보인다.
황구지천 북쪽이 융건릉이다. 사도세자 부부(융릉)와 정조 부부(건릉)가 잠들어 있다. 아버지 무덤을 이곳으로 옮겨 온 이면에는 국토는 물론 권력까지 재편하려는 왕의 웅대한 포부가 서려 있다. 효를 앞세워 묵은 때 마냥 덕지덕지 낀 구체제의 폐단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 기세로 잇따라 화성을 축조해 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즉위 일성에 어울리는 행위이자 치적이다. 그 배경에 독산성이 있었다.
독산성 전투와 세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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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산성 동문이 있는 보적사 쪽에서 바라 본 독산성. 1.1 km 둘레로 지형을 따라 별모양으로, 포곡식과 퇴뫼식을 절충하여 쌓았다. |
| ⓒ 오산시청 |
그나마 패배에서 배우는 이가 있었다. 권율은 이끌고 간 군대를 비교적 온전하게 수습해 후퇴한다. 이 부대와 의병이 합세, 7월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완주와 금산 사이 고개를 지킴으로써 전주가 보전되는 전과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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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남문 독산성의 주 출입문인 진남문과 주변 성곽. |
| ⓒ 이영천 |
어떤 성이건 가장 주요한 시설이 우물이다. 지형이 불리하니 왜군도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다. 식수를 차단하려 제방을 쌓아 물줄기를 틀어막고, 농성이 풀리기만을 기다린다. 이에 권율도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 유격전과 야습으로 제방을 헐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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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마대 독산성 정상의 세마대. 흰쌀로 말을 씻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
| ⓒ 이영천 |
융릉과 독산성
즉위 일성으로 충격을 던진 왕의 첫 행보가 아버지 격을 높이는 일이었다. 존호를 장헌(莊憲)으로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여 세운다. 십수 년이 지나, 아버지 묘를 옮길 명분을 마련한다. 효를 앞세운다. 왕릉에 버금가는 격을 차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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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릉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서 이곳 화산 자락으로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이장해 오면서 '현륭원'으로 높여 부른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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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주사 현륭원 관리를 위해 폐사지에 세운 능침사로 나라의 재정지원이 풍부했다. '용주사' 현판이 있는 삼문의 모습이다.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가 주축이 되어 공동제작한, 북경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다는, 탱화가 유명하다. |
| ⓒ 이영천 |
민둥산이 옷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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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문과 성벽 황구지천 방향의 서쪽을 지키던 성벽. 좁은 성문을 깊게 파, 적이 문으로 들어오면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문을 고안했다. |
| ⓒ 이영천 |
산성 안에 백제 시대에 창건된 보적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절의 창건 설화가 재미있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굶어 죽을망정 구차하게 연명하긴 싫었나 보다. 남은 쌀 두어 되를 기꺼이 부처님께 바치고자 했다. 죽더라도 존엄만은 지키자는 생각에서다. 독산의 절에 공양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하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름 그대로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寶) 쌓이는(積)' 신통력을 보여줘 보적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민둥산인 독산에 언제부터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을까? 그 답을 실록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1790년 2월 1일 실록은 '내탕고의 돈 1천 냥을 현륭원에 내려보내, 나무 심는 비용으로 충당했다'고 기록한다. 현륭원이 빤히 내려다보인다는 신하들 간언으로, 이때 독산성에도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말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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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건릉과 독산성(1872년지방지도_수원부_부분) 둥글게 표시된 독산성과 융건릉 사이에 '세람교'라는 다리 표시가 유별나다.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 운구행렬이 세람교를 지났다고 한다. 화산 아래 왼쪽부터 차례로 건릉, 현륭원, 용주사가 나란하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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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남문과 성벽 정조가 왕세손으로서, 그리고 아버지 묘 이장을 완료하고 각각 활을 쐈다는 진남문 일대의 성곽. |
| ⓒ 이영천 |
경원시하던 '禿(독)'이란 글자가 갑자기 어려워졌다. 벌거벗는다는 게 무척 생경하게 다가든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어느 누가 세상으로 나설 수 있겠는가? 벌판에 나 앉은 낮은 산이야 가능하겠으나, 아무도 이를 따르진 못할 것이다. 무릇 세인은 타인의 눈과 마음은 물론 자신의 그것에도 장막 치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독산과 작은 성이 '왜 그런가?'라며 말없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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