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움은, 입장료 이상의 가치가 있네"

김성수 2025. 6. 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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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의 시심과 나의 양심이 만난 틴턴 수도원

[김성수 기자]

영국에서 산 세월이 35년이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 자녀들은 초중고대를 영국에서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욕심쟁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얼마전 우리 가족이 방문한 틴턴 수도원과 그 부근 여행기에 대해 나누고 싶다. - 기자말
 정면에서 본 틴턴 수도원
ⓒ 김성수
얼마 전, 우리 가족은 영국 웨일스의 명소, 틴턴 수도원(Tintern Abbey)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한 휴가. 날씨는 맑았고, 기분은 좋았다. 수도원에 얽힌 낭만주의 시인의 이야기부터, 입장료를 둘러싼 '양심의 기로'까지… 웨일스에서의 며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했다.

시 한 편으로 시작된 역사 여행 - 워즈워스의 틴턴 수도원

1798년,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틴턴 수도원을 찾아 그 유명한 시, <틴턴 수도원 회고(Lines composed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를 남겼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 시간의 흐름을 한 폭의 그림처럼 표현하며, 이곳을 단순한 폐허 이상의 의미로 끌어올렸다.

"이 아름다운 형태들이 내게 가져다 준 것은 조용한 기쁨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수도원의 고딕 아치와 무너진 회랑을 걸으며, 이 구절을 나지막이 읊었다. 돌기둥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수도사들의 낮은 기도 소리가 와이 강 너머에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 그 자체가 하나의 시였다.

"손주 분들인가요?" - 진지하게 대답한 자, 입장료를 내다

역사와 시심에 흠뻑 젖어 들기 직전, 뜻밖의 '입장료 에피소드'가 우리를 맞이했다. 매표소에 다가간 아내가 표를 사려던 찰나, 직원이 우리 아이들을 힐끔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손주 분들이 18세 이하인가요?"

이 질문은, 말하자면 하나의 시험이었다. 영국에서는 18세 이하 청소년, 65세 이상 노인에게 많은 유적지가 무료입장이다. 만약 그 순간 내가 "네"라고만 했더라면, 우리 4인 가족은 전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가족여행 예산의 절반을 절약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엉겁결에 나는 바보처럼(?) 말했다.

"아니요. 다 성인이고, 손주가 아니라 저희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저희도 아직 65세 이하입니다…"

직원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미안한 듯, 약간 당황한 듯. 그러나 결국은 성인 4명의 입장료를 꼼꼼히 계산했다. 아내는 쿨하게 카드 결제를 마쳤고, 순간 '정직세(正直稅)'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직의 대가가 약 34.80파운드(약 6만 5천 원)라니, 파운드로 환산된 양심이라 할 만 했다.

틴턴 수도원, 폐허 위에 피어난 고요한 위엄
 (손주가 아닌) 자녀들과 틴턴수도원에서
ⓒ 김성수
당연히 낼 것을 내고 들어갔는데 뭔가 괜히 아까운 생각이...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수도원 입구를 지나 고딕 양식의 거대한 아치형 창과 허물어진 지붕이 드러나자, 억울함은 이내 사라졌다. 1131년에 시토회 수도사들에 의해 설립된 이곳은, 한때 웨일스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었고,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시기인 1536년에 문을 닫은 이후 폐허로 남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폐허가 영국 낭만주의 시대에는 예술가들의 성지가 된다. 시인 워즈워스와 테니슨, 화가 J.M.W. 터너까지 - 이 황량한 돌무더기는 영혼을 깨우는 예술적 자극제였다.
우리는 무너진 성당 내부를 걸으며 속삭였다.

"이 아름다움은, 입장료 이상의 가치가 있네."

입장료는 잊고, 시간 속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 명소 - 와이 강 계곡에서 찾은 또 다른 평화

틴턴 수도원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지만, 주변에는 와이 강(Wye River), 딘숲(Forest of Dean)을 따라 숨어 있는 명소들이 많다. 우리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체프스토우 성(Chepstow Castle)도 들렀다. 웅장한 절벽 위에 서 있는 노르만 시대의 성으로, 내려다보는 강물과 붉은 벽돌 성채의 조화는 그 자체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우리는 정직하게 입장료를 지불했다.

그리고 와이 강변 산책로에서의 여유. 무료라는 사실이 더욱 감동적인 이곳은, 풀냄새와 새소리, 잔잔한 강물 소리가 어우러져 머리를 맑게 해준다. 도심의 소음과 걱정에서 잠시 떨어진 듯한 평화가 있었다.

"정직함도 여행의 일부다" - 가족의 농담 속에서 피어난 웃음
 딘숲(Forest of Dean)에서 아내와
ⓒ 김성수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정직 프리미엄 덕분에 우리 여행이 더 고급스러워졌네."

아이들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빠, 다음부터는 그냥 '손주 맞아요' 하세요. 다들 젊게 봐주면 고맙고요."

나는 농담처럼 대답했다.

"아니, 우리 자녀들이 손주로 보인다는 게 더 문제 아닌가?"

우리는 함께 웃었다. 순간, 워즈워스의 시가 마음속에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그 선물이 무엇인지 느낀다..."

정직함으로 손해 본 것 같지만, 그날 우리가 얻은 선물은 분명했다. 가족과 함께한 행복한 시간, 자연의 경이로움, 그리고 그 순간을 웃으며 넘기는 마음의 여유였다.

틴턴 수도원은 무료가 아니었지만, 추억은 값졌다

영국에서 살아온 세월, 나는 깨달았다. 정직은 때로 비싸다. 하지만 결국엔 가장 값진 선택이기도 하다. 다음번에도 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글쎄, 그때는 이렇게 말해볼까.

"손주인지 자녀인지... 요즘은 다들 헷갈려요, 세월이 참 빠르죠."

거짓말은 아니지만, 해석은 상대방에게 맡기는 이른바 영국식 유머와 여유의 기술이랄까.
물론, 이번엔 '쿨하게' 정직했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웨일스의 풍경보다 빛났던 가족과의 시간

틴턴 수도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거대한 폐허나 워즈워스의 시보다도, 그 안에서 함께 걸은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내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자연을 거닐고, 역사 위에 서서 그 시간을 나눈 기억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였다. 비록 '공짜 입장'은 놓쳤지만, 그날 우리가 얻은 '정직한 추억'은 아주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 틴턴 수도원은 행복한 우리 가족에게 그저 역사 유적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정직과 유머, 시와 현실이 만난, 어느 아름다운 봄날의 특별한 무대였다.

● 여행 팁:
틴턴 수도원 입장료: 성인 £8.70 (2025년 기준) / 18세 이하 및 65세 이상 무료
개장 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
주변 명소 추천: Chepstow Castle, Forest of Dean, Wye Valley 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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