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반 만에 베이징 가봤더니... 한중 관계, 심각합니다
[조창완 기자]
5년 반여 만에 찾은 베이징은 사드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초토화된 한중 관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베이징 한국 교민사회는 거의 흔적이 없어지고, 미래의 한중관계를 말해주는 유학생들 마저 과거에 비해 줄어들면서 어두운 앞날을 예고했다. 100년 전에도 이런 불운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급히 베이징에 남아있는 단재 신채호나 이육사, 김산(본명 장지락), 이회영 선생의 유적을 살피면서 역사를 복기해 봤다. 이런 상황이 한국의 외교나 대외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
|
| ▲ 번화한 왕징 왕징은 공항과 가까워 코리아타운이었다. 지금은 고급 오피스가 들어서며,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옌자오 등으로 이주했다. |
| ⓒ 조창완 |
필자는 기획재정부 강의 등에서도 사드 결정은 우리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 권리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만 대중관계에서 이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도 알아야 한다는 취지를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중국과 최소한의 예의도 무시한 채 사드 배치를 결정했고, 그 후폭풍을 맞고 있다.
사드 배치 이후 한중관계는 엉망이 됐다. 관광 교류는 물론이고, 한국 문화 콘텐츠의 중국 내 방송이 금지되면서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 당시만 해도 10만 명에 이르던 중국 내 한국유학생 숫자는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1만5000명 정도로 급속히 줄었다.
거기에 2020년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코로나 팬데믹은 그나마 남은 한중관계를 완전히 없애는 악재였다. 필자 역시 우한 봉쇄가 시작되던 2020년 1월 16일 상하이 홍차오 공항에서 나온 후 5년 동안 중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선은 생업에서 중국과 관련성이 멀어지면서 굳이 중국 출장을 갈 일이 없었다.
쪼그라든 베이징 한인 사회
지난해 늦여름 가족 일로 잠시 창춘에 다녀온 후 이번에 베이징을 찾은 것은 업무의 재개도 큰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 방문에서 이미 초토화된 중국 내 한국 사회를 확인했다.
베이징 수도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왕징(望京)은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곳이다. 한 때 15만 명 넘는 한국인이 이곳에 살았고, 두 집에 하나는 한국 음식점이라 할 만큼 한국 음식점이 많았다. 하지만 사드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베이징 내 한국인 사회는 초토화됐다.
|
|
| ▲ 왕징에 위치한 베이징한국성 왕징에 위치한 베이징한국성은 대부분 한국 음식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가게를 찾기가 힘들다. |
| ⓒ 조창완 |
이런 상황으로 인해 베이징의 한국 사회 자체가 위기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가장 단적으로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 1998년 9월 1일에 개교한 '북경한국국제학교'였다. 한국 교육부와 중국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이 학교는 2015년 전후로 한 해 초중고생이 300명 가까이 졸업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지난해 졸업생 숫자는 182명(초 46, 중 69, 고 67명)으로 줄었다. 과거 입학 경쟁이 치열해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입학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학생을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제는 한 학년에 한 반 채우는 것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베이징 골목 속 독립운동가의 흔적
|
|
| ▲ 베이징 지하철 구입부스 복잡한 노선도 만큼이나 잘 구축된 지하철 |
| ⓒ 조창완 |
업무를 마치고 주말에 시간을 내어서 100년 전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렀던 후통을 돌아봤다. 대부분 이미 둘러본 곳이지만, 여름에 진행하는 테마여행의 안내를 위해서 지금의 교통상황을 확인하는 게 주 목적이었다.
|
|
| ▲ 이육사 선생이 순국한 베이징 일본 헌병대 감옥터 군대 숙소로 바뀐 이곳은 건물 구조가 감옥터라는 것을 말해준다. 내부에는 과거 사진이 있다. |
| ⓒ 조창완 |
|
|
| ▲ 동창후통 28호 옛 사진 동창후통 28호 옛 사진 |
| ⓒ 조창완 |
|
|
| ▲ 징산동지에 후통 징산동지에의 후통의 사합원. 전형적인 문당대호인 집이다 |
| ⓒ 조창완 |
이 주변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살던 차오도우후통(炒豆胡同)이나 따헤이후후통(大黑虎胡同)이 있다. 춘원 이광수 작가가 단재의 집에 들렀을 때, 너무 헤져서 이불 문양 보기도 힘들 정도로 궁벽하게 살았던 단재 선생은 1921년 1월부터 3월까지 이곳에서 사재를 털어서 '천고'(天鼓)를 발행했다. 중국어로 발행됐던 이 잡지를 통해 단재는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야만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도 1919년 2월 서울을 떠나 베이징에 머물렀다. 이곳에는 김규식, 조성환, 이동녕, 조완구 등이 찾기도 했는데, 당시 거주지가 마오얼후통(帽儿胡同) 29호와 후고루원후통(后鼓楼苑胡同)으로 알려졌다.
|
|
| ▲ 이회영 선생 주거지 추정지 마오얼후통과 후구루원후통은 이회영 선생의 주거지로 알려졌다 |
| ⓒ 조창완 |
생각해 보면 단재나 우당 선생이 베이징에 머물던 시간에서 100년 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해방, 한국전쟁, 한중수교 등 수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한국은 그 사이에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설 만큼 발전했으니, 그분들의 노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나는 향후 100년 후를 생각했다. 한중관계가 복잡해진 10년여 사이에 중국은 미중 헤게모니 싸움 속에서도 국가의 위상을 끊임없이 강화했다. 고속철, 전철 등 국토 인프라 뿐만 아니라 우주 프로젝트인 톈궁(天宮)이나 세계 최대의 전파 망원경인 톈옌(天眼) 등으로 우주까지 영역을 넓혔다. 철강이나 화학은 한국을 추월하는 분위기고, 조선이나 반도체 등도 추격 중이다.
또 중국은 영향력 있는 과학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논문을 기준으로 한 2024년 네이처 인덱스 교육기관 국가 순위에서 미국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중국 23171.84점, 미국 20291.79점) 한국은 1631.02점으로 8위였다.
이런 가운데 중국 내 한국인 사회의 위축은 불안한 미래를 말한다. 반면에 한국에 있는 중국 유학생 숫자는 지난 10년 간에도 8만 명을 상회한다. 특히 중국 유학생 유치 숫자로 봤을 때, 2024년 1위인 한양대는 8200명대이고, 5위인 중앙대도 5300명대다. 중국 내 한국유학 숫자와 한국 내 중국유학생 숫자의 큰 차이는 향후 한중 관계에서도 숫자가 많은 국가가 우위를 가질 확률이 높다. 또 밀접한 경제 구조를 가질 경우에 경제적 예속의 위험마저 있다.
6년여 만에 베이징행은 그런 불안을 확인시키기에 충분했다. 필자가 베이징에 살 때 가장 흔하던 현대자동차의 택시는 이제 사라지고, 전기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만 해도 1위를 차지했던 삼성 이동전화는 이제 매장 자체가 희귀해지고, 옥외광고도 대부분 오포 등 중국 가전업체가 차지하고 있었다.
|
|
| ▲ 베이징 스차하이의 호수 이 호수 주변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살았다 |
| ⓒ 조창완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TK 장녀' 외과의사가 대구경북을 수술한다면? "고쳐 쓸 수 없다면 도려내야"
- 5년 전 '리박스쿨' 기자회견 참석한 김문수, 정말 몰랐나?
- 대세 기울자 제 살길 찾는 권력기관들
- 이승환·하림 같은 피해자, 다시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국힘 의원 "12.3부터 오늘까지 반역의 시간, 이재명 처단해야"
- 아직 청춘입니다, 발레로 증명합니다
- 1년에 단 하루만 문 열던 곳... 그 앞에서 눈물 흘린 사람들
- [오마이포토2025] 이준석 "김문수 투표는 사표, 윤석열-황교안-전광훈 뽑는것
- "누구 마음대로 전국이냐"...전국 사회복지사 김문수 후보 지지선언 논란
- [손병관의 뉴스프레소] 짐 로저스의 '이재명 지지 선언' 진위 논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