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으로 실습 나간 고등학생의 현실, 우리가 놓친 것
김성호 평론가
처지가 다르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 많다.
구술생애사이자 작가 최현숙의 <창신동 여자> 속 문장이다. 뇌경색으로 인한 편마비에 고혈압, 당뇨병, 치매초기 증상까지 있는 기초수급자 노인과 그에 붙어살며 수급비로 생활하는 주민등록도 없는 여자의 이야기를 최현숙은 상당한 취재를 바탕으로 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소설로써 써냈다. 이 시대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다룬 얇은 이 소설에서 단 한 문장을 꼽는다면 나는 위에 적은 이 문장을 들 것인데, 공감하고 인정할 밖에 없는 우리네 세상사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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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학년 2학기 스틸컷 |
| ⓒ JIFF |
내가 사는 도시를 밝히기 위하여 거대한 빌딩 하나를 그대로 눕힌 것만큼 커다란 배에 기름을 가득 채워 하루 두 척 씩을 들여와야 한다는 것을, 만선이 된 유조선이며 LNG, LPG 등 외부 공격에 취약한 에너지 선박이 지나는 길목마다 미국의 항공모함이며 전투선박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제조업 기반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에너지를 사올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으며, 그 길목을 닦고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 것인지를, 그로부터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좁고 긴 예멘땅과 그곳을 지나는 송유관, 이 나라에 출몰하는 수많은 국가의 군부대며 비정규군, 끝나지 않는 내전과 난민에 얽힌 사연까지를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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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학년 2학기 스틸컷 |
| ⓒ JIFF |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를 이번 영화제에선 보지 말기로 내심 결심했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선 유달리 훌륭한 작품이 많았고, 외국에서 들여온 작품 대부분은 다시는 한국에서 만날 수 없을 운명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3학년 2학기>는 지난해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 등 여러 부문을 수상하며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터다. 그 여파로 올해 개봉까지 예정돼 있으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를 본다는 건 남보다 조금 일찍 영화를 만난단 것,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는 터였다.
그러나 나는 끝내 합리적일 수가 없었다. 우리 시대, 우리 세대, 우리 공동체의 유효한 고민을 이 영화가 어찌 다뤄내고 있는지 어서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한국사회에 실존하지만 흔히 다뤄지지 않는, 그보다는 외면되고 무시당해온 것이란 걸 알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우리의 언론이, 예술이, 그리고 영화가 그를 충실히 다루지 못했단 걸 인정하는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다르기를 바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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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학년 2학기 스틸컷 |
| ⓒ JIFF |
<3학년 2학기>는 <다음 소희>의 남학생 편으로 보아야 할까. 소희가 콜센터 여직원이었다면, <3학년 2학기>의 주인공 창우(유이하 분)는 중소기업 공장에서 실습생이란 이름으로 현장노동에 투입된다. 둘 모두 이름만 화려한 직업학교 출신 3학년이며, 현장실습을 통해 사실상의 취업을 하였단 점이 꼭 같다.
다른 점이라면 신체건강한 창우는 징집대상으로, 실습 평가에 취업과 대학진학은 물론, 군 대체복무까지 걸려있단 점이랄까. 극중 창우의 엄마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회사가 남자를 우대하지 않느냐"는 편한 시각으로는 닿지 못하는 진실이 반영돼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 시대 소위 중후장대며 해운 등의 남초 산업현장 이야기가 매체에 과소대표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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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학년 2학기 스틸컷 |
| ⓒ JIFF |
창우는 여러모로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느리고 둔하다. 머리도 빠르지 못하여 직업계 고등학교에 온 것이 꼭 집안사정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을 듯하다. 단 며칠 실습 만에 사수로부터 에이스가 못된다고 판정되는데, 그를 부연하는 '폐급은 아니'란 말이 꼭 "사람은 착혀" 쯤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곁에 함께 일하는 야무진 친구에 비하여서 창우는 제가 하는 일도, 저를 둘러싼 구조도,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일에도 도무지 능하지가 못하다. 아니 상당히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이 창우가 마주한 모든 부조리를 감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부족하다는 이유로 욕을 먹고, 위험에 내몰리며, 부당함을 감수하기를 강요받아선 안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떠한가. 스스로를 루저라고 낙인찍고, 모든 부조리를 감내하라고, 그것이 다 네가 못난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스라이팅이란 말이 이보다 적절하게 쓰이는 경우를 나는 익히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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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 ⓒ JIFF |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이 시대 한국에 유효한 작품이라 여긴다. 영화가 다루는 문제가 한국에 실재하기 때문이며, 이를 이 정도나마 다룬 작품이 채 한 줌에 지나지 않는 탓이고, 그를 다루려는 의지와 노력, 수고를 감당하려는 자세가 엿보이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3학년 2학기> 속 아이들과 같은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스스로를 긍정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점, 기성세대가 구조의 개선 대신 개개인의 탈출만을 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3학년 2학기>는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필요할 때 나타난 필요한 목소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귀하지 아니한가.
나는 이 영화를 고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영화와 내가 만나야 할 때 만났다고 믿는다. 이 글에 온 마음을 싣는 것은 이야기 속 아이들이 우리 시대의 얼굴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며, 내 시선이 거의 그에 머무르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기 때문이다. 영화가 나 아닌 관객에게 주는 감상 또한 그와 같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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