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줄 알았는데 66년 만에 돌아와 성공한 만년필 업체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덕래 기자]
선물 받은 펜이라면 또 모를까, 딱 한 자루 갖고 있는 만년필이 내부가 투명한 데몬펜일 확률은 낮습니다. 손에 쥐었을 때 부담스러울 만큼 큼직한 오버사이즈 모델이거나, 캡을 배럴 뒤에 꽂지 않으면 제대로 쥐기조차 힘든 포켓 만년필인 상황도 드뭅니다.
소네트는 파카를 대표하는 모델 중 하나입니다. 머릿속으로 만년필을 상상했을 때, 딱 떠오르는 그 이미지에 가까운 펜입니다. 길이는 130mm 가량, 외경은 10mm 초반의 표준 사이즈 만년필에 해당합니다. '표준'이란 말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무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도드라지지 않은 것들은 편하게 여겨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으로 보면 새로움은 덜하단 말이 됩니다.
UEF촉에서 시작해 BB촉을 넘어 캘리촉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특수촉까지 아우르면, 만년필 펜촉의 종류는 열 손가락을 금방 넘어갑니다. 제대로 구분하면 양말을 벗고 발가락까지 꼽아야 되지만, 만년필 입문자는 EF, F, M촉 중 하나를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선정되는 펜촉은 역시나 F촉입니다. '기본촉' 혹은 '보통촉'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가 자주 입는 티셔츠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하늘색, 노란색, 초록색을 비롯해 여러 컬러가 있지만, 역시나 가장 기본이 되는 티셔츠 색상은 흰색입니다. 재킷 컬러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받쳐 입기 좋은 색이니까요. 그러니 알록달록 컬러풀한 티셔츠를 입고 나온 친구의 옷장엔, 100사이즈 흰색 기본티가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 만년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몽블랑 149처럼 확연히 크거나 카웨코 스포츠처럼 아담한 펜, 또는 트위스비 580처럼 속이 투명하거나 파이롯트 캡리스처럼 매커니즘이 독특한 펜, UEF촉이 꽂힌 플래티넘 센츄리나 1.9mm 캘리촉을 장착한 라미 사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의 펜파우치 안에는, 이미 F촉을 꽂은 파카 소네트같은 만년필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카웨코KAWECO는 188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시작했습니다. 이젠 프랑스 브랜드가 되었지만 본디 미국 태생인 워터맨은 한때 만년필계 정점이었습니다. 카웨코 역사에 워터맨만큼 영화롭던
시절은 없습니다. 되레 고난과 시련의 시간이 있었으나, 대견하게도 딛고 일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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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년 만에 새롭게 태어난 카웨코KAWECO |
| ⓒ 김덕래 |
경쟁자가 없어 창출 기대치가 높은 시장을 '블루 오션', 충분한 그 이상으로 주목받아 치열하게 치고받아야만 하는 시장을 '레드 오션'이라 합니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으면 보라색이 된다는 의미로, 위 두 마켓을 합친 형국을 경제 용어로 '퍼플 오션'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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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플 오션' 시장에서 확연한 존재감을 가진 독일 태생 만년필 제조사 |
| ⓒ 김덕래 |
카웨코의 두 번째 장점은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간판에 해당하는 스포츠 라인뿐 아니라, 단순미를 극대화한 릴리풋 라인은 언뜻 봐선 만년필인지 알아채기조차 힘듭니다. 탭과 배럴의 컬러가 투톤인 페르케오 역시 눈으로 보는 맛이 꽤 쏠쏠합니다. 만년필 입문 모델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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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웨코 스튜던트 70's 소울(좌) & 60's 스윙(우) |
| ⓒ 김덕래 |
한때 몽블랑, 펠리칸처럼 피스톤 필러 방식의 만년필을 만들던 카웨코가 언제부터인지 카트리지&컨버터 방식을 고수했었는데, 다시 스포츠 라인에 피스톤 필러 타입을 추가한 것도 반갑습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늘었다는 건, 즐길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이니까요.
카웨코의 세 번째 장점은 '의외성'에 있습니다. 의외성이란 예상했던 바와 다른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풀코스 정식이 나오는 유명 맛집에 가면, 그에 걸맞게 모양새뿐 아니라 향과 맛까지 다 근사한 음식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때 생각했던 것보다 맛이 덜하면, 잔뜩 들떴던 기분이 훅 떨어지고 맙니다. 반면 간판도 내부 인테리어도 소박한 음식점에 갈 땐, 기대치가 낮아집니다. 그때 만약 기막힌 음식이 나오면 기쁨은 배가 됩니다.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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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담하지만 단단한 카웨코 스튜던트 펜촉(F) |
| ⓒ 김덕래 |
얼마 전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 'X이벤트 시대, 만년필 한 자루의 힘'이란 타이틀로 인문학 특강을 했습니다. X이벤트Extreme Event는 발생 가능성이 낮아 예측 대비하기 어려우나, 일단 현실의 일이 되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오는 사회 현상을 의미합니다. 역대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의성 산불', 듣도 보도 못한 '대대대행 체제'라는 결과를 가져온 대통령 탄핵, 국내 통신사 역사상 가장 큰 해킹 사고인 'SKT 유심 사태' 등이 다 X이벤트에 해당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너무도 강력한 이슈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이 너무 자주 발생해, 어지간해선 별로 놀랍지도 않은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근육을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몸의 근육을 키우려면 팔과 다리를 부단히 움직여야만 합니다.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근력이 강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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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 근육 단단히 하고 싶은 당신에게 만년필을 권합니다. |
| ⓒ 김덕래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구전문잡지 온더데스크 On the Desk 8호(2025.여름)에도 실립니다.연일 기막히고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기사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다스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수영하다 숨 쉴 타이밍을 놓치면 위험해지는 것처럼, 우리 모두 물 위에서 살지만 자칫 삶의 중요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기구 한 자루에 무슨 큰 힘이 있을까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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