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엔 '빵보다 따뜻한' 무언가가 있다

김성수 2025. 5. 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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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푸드뱅크, 에코빌리지, 투굿투고가 전해준 '조용한 선함'의 힘

지난 35년간 영국에서 살고 있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 자녀들은 초·중·고·대학교를 영국에서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나는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그러면 영국 우리 마을의 ‘삼총사’에 대해 나누고 싶다. <기자말>

[김성수 기자]

 하늘에서 본 우리마을. 드론 촬영
ⓒ 김성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영국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셔 주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런던에서 기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인구 약 2만5천 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우리 마을 분위기는 고풍스러운 19세기 형 빅토리아풍 건물, 정돈된 거리, 작지만 개성 있는 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자연과 함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전형적인 영국 시골 마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걷기 좋은 마을로, 도보로 모든 주요 거점을 둘러볼 수 있다. 가족 단위 생활, 노년층, 젊은 예술가들이 조용한 삶을 누리는 지역이다. 영국 지역문화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비교하자면 전북 전주의 한옥마을 근처나 가평, 남해 같은 조용한 소도시 느낌이 든다.

관광지보다는 영국 현지인들의 진짜 삶을 엿볼 수 있는 마을이다. 주위엔 초록 들판, 운하, 오랜 교회건물 등 그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시끌벅적한 런던이나 버밍엄 등 대도시와는 다른 소박함과 여유가 있는 곳이다. 런던에서 기차로 바로 연결돼 1시간 거리라 접근성도 나쁘지 않다.

"밥은 먹고 다니냐?"

한국 엄마들의 잔소리는, 영국 동네에서는 이렇게 바뀐다.

"푸드뱅크 쿠폰은 받았니?"

요즘 우리 동네를 걷다 보면, '은근히 감동' 이 있는 풍경에 자꾸만 발길이 멈춘다. 영국 생활 35년, 이제는 이방인이 아니라 이웃이 된 나에게, 이 작은 공동체의 따뜻한 움직임들은 참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 중심엔 '착한 삼총사'가 있다.

푸드뱅크(Food Bank), 에코빌리지(Eco Village), 그리고 투굿투고(Too Good To Go).

이 셋은 단순한 서비스나 프로젝트가 아니라, 우리마을 공동체의 정체성이자 철학이다.

[푸드뱅크] "왜 묻지 않아요?" "그냥 돕는 게 이치니까요"
 우리마을 푸드뱅크(Food Bank), 다 무료로 누구가 가져 갈 수 있다
ⓒ 김성수
우리동네의 푸드뱅크는 단순히 '공짜 음식'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존엄' 을 지켜주는 생명선이다. 신청서에 복잡한 서류도 없고, 소득증명도 필요 없다. 단 한 마디, "도움이 필요해요" 만으로 충분하다.

매주 목요일, 동네 교회 홀은 마치 작은 슈퍼마켓처럼 꾸며진다. 동네 슈퍼마켓인 테스코(Tesco), 세인즈베리(Sainsbury's) 등에서 기부한 식재료들, 누군가의 손길이 담긴 집에서 만든 잼까지 아무나 와서 정말 1원 한 장 안 내고 공짜로 원하는 것을 한 바구니 가져 갈 수 있다. 아무도 전혀 눈치주지 않는다.

어느 날, 푸드뱅크 수혜자였던 한 동네 할머니가 케이크를 구워 왔다. "지난주 받은 밀가루로 만들었어요." 받는 사람이 다시 주는 사람으로 변하는 이 장면,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에코빌리지] "세탁기 돌릴 때 나오는 미세플라스틱이요?"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는 이곳은 마치 '우리동네 '힙스터'(Hipster', 전통적인 주류문화나 상업주의에 반발하며 개성, 독창성, 비주류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생태실험실' 같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정말 실용적인 공동체다. 태양광 충전소, 빗물 정화장치, 폐자전거 재활용… 겉보기엔 다소 번거로워 보이지만, 누구도 억지로 하진 않는다. "할 수 있을 만큼, 같이 하자"는 철학이다.

매주 토요일 열리는 '수리 카페(Repair Café')에서는 고장 난 물건들이 수명을 되찾는다. "1987년부터 쓰던 토스터인데…"라며 가져온 할아버지는, 수리 후 황금빛 토스트를 보고 미소를 지으셨다. 전기기사는 퇴직한 이웃이고, 기술은 재능기부다.

수리 카페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소형 가전제품, 컴퓨터, 장난감, 재봉틀, 장신구 등 다양한 품목을 수리해 준다. 수리 카페의 목표는 수리와 재사용을 장려해 폐기물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임으로써 지속가능성을 증진하는 것이다.

물론 이곳도 다 무료다. 원하는 사람은 여력이 되는 만큼 기부 하면 된다.

[투굿투고] "오늘 저녁은 미스터리 박스!"
 우리동네 투굿투고(Too Good To Go)를 통해 산 음식
ⓒ 김성수
 우리동네 투굿투고(Too Good To Go)를 통해 산 음식
ⓒ 김성수
Too Good To Go는 이름 그대로 '버리기엔 아까운 음식'을 구조하는 앱이다. 동네 빵집이나 식당들이 팔고 남은 음식들을 미스터리 박스 형태로 저렴하게 판매한다.

5파운드짜리 커리 세트(약 9300원), 3파운드(약 5500원)짜리 크루아상(Croissant: 프랑스식 페이스트리 빵으로, 겹겹이 결이 살아 있는 초승달 모양의 빵) 한 봉지… 어떤 날은 할로윈이 한참 지난 11월 초, 유령 과자가 봉지 가득 들어 있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린시절 유령 소굴 냉장고에 꺄르르 웃고, 우리 부부는 절약에 뿌듯해 졌다.

음식낭비도 줄이고, 동네 소상공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환경도 지키고… 이보다 더 '착한 소비' 가 있을까?

조용한 선함이 우리 마을을 바꾼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자원봉사들이다. 그래서 이곳에 갈 때 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는 게 참 팍팍한 세상인데, 이런 배려가 세상을 따뜻하게 하네."

영국은 복지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사실은 시민들이 먼저 움직이는 일이 많다. 거창한 캠페인 없이, 조용히 실천하는 방식. 자기가 자원봉사 하는 일은 과소평가(understatement), 바로 그것이 이 나라 공동체 정신의 본질 아닐까.

오늘도 아내 전화엔 '투굿투고' 알림이 뜬다.

"동네 빵집에서 깜짝 선물 가방을 판매하고 있어요!(Local bakery has a surprise bag available!")

또 다른 따뜻한 모험이 시작된다. 그 모험 하나하나가 우리 마을을, 그리고 언젠가는 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나갈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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