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대원으로 여의도공항 착륙했으나

김삼웅 2025. 5. 2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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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33] 또 한번 반전이 일어났다

[김삼웅 기자]

광복군으로 국내 진공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또 한번 반전이 일어났다. 정진대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무기 탄약을 제외한 모든 휴대품을 줄이고, 이범석·장준하·김준엽·노능서 한국군 4명과 미국측에서도 4명을 줄여 22명으로 진공대의 인력이 조정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출동한 C-46 수송기는 18일 오전 3시 30분경 서안 비행장을 이륙하여 새벽녘에 한반도 상공에 이르렀다. 장준하와 김준엽의 가운데 좌석에 앉았던 이범석 장군이 펜을 꺼내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부서지고 이몸 찢기워도
찟긴 몸 이 연안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치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테니….

비행기가 한강 줄기를 따라 영등포상공에 이르렀을 때에야 일군의 답전이 왔다. 정진군의 계속되는 무전연락에 일군은 묵묵무답이다가 뒤늦게 여의도에 착륙하라는 답전을 보낸 것이다. 18일 오후 3시경에 수송기는 여의도공항에 착륙했다. 격납고 앞에는 일군 1개 중대 병력이 일본도를 뽑아들고 정렬해 있고, 격납고 뒤에는 무장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살벌한 분위기였다.

피를 말리는 긴장감 속에서 대치하다 장준하 일행이 다가서자 일군은 의외로 포위망을 풀고 비켜섰다. 충돌 직전에 일군이 포위망을 푼 것은 동경 대본영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말라는 지시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조선군사령관 죠오쯔기(上月良夫) 중장과 미군 뻘드 중령의 대좌가 이루어졌다. 죠오쯔끼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고, 뻘드는 한글과 일어로 된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전단을 내밀었다. 일군은 동경 대본영에서 아무런 지시도 받은 바 없으니 더 이상 머물지 말고 돌아가 달라고 통고했다. 자기네 병사들이 흥분해 있어 신변보호에 안전책임을 지기가 어렵다고 협박도 했다.

뻘드는 일본은 이미 항복을 했으니 동경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일군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 양측의 협상결과 서안까지 돌아갈 가솔린을 다음날까지 보급해주기로 하여 타협이 이루어졌다. 장준하 일행은 이날 밤을 여의도 일군 병영에서 머물렀다. 맥주대접을 받았다. 장준하는 이날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청교도적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 술·담배를 하지 않았고 친구들도 아예 술을 권하지 않았던 터이다.

"장형, 오늘 저녁만은 술을 마셔야 하오, 우리가 언제 살아남아 왜놈의 항복을 보고 또 왜군 대좌가 꿇어앉아 술을 권하리라고 꿈이나 꾸었겠소. 이 승리의 술잔만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야 하오."

동지들의 권주가였다.

장준하는 조국의 첫 밤, 그것도 일군 병영에서 첫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가 새벽 일찍 일어났다. 동지들과 수통에 고국의 물을 가득 채우고 종이봉투를 만들어 흙을 한 줌씩 담았다. 서안에 남아 있는 동지들에게 고국의 물과 흙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장준하는 8월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듯 하다. 1918년 8월에 태어나고, 1945년 8월에 한국광복군으로서는 최초로 고국에 들어왔으며, 그로부터 정확히 30년이 지난 1975년 8월 17일 의문사를 당했다.

이범석 장군은 사절단의 고문 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뻘드 중령을 설득하여 조선 총독을 만나 담판할 것을 일군 측에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였다. 그의 기록을 살펴보자.

나는 광복군지대장의 신분으로 와서 일본군들의 감정을 자극하기 보다는 다른 명목이 좋을 듯해서 중국 장개석군사위원장의 고문과 웨드마이어 장군의 고문자격으로 왔다. 그러나 여의도 비행장에 내리는 즉시 우리 일행은 일군의 대대병력에게 겹겹이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당초 예정은 오는 즉시 여운형·안재홍·김성수 등 국내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여 임시정부 측과 건국을 위한 대화의 통로를 열어 볼 계획이었으나 일군 조선군사령관은 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쌍방이 모두 자동화기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채 담판을 했다. 일군 장교들은 눈알이 벌게 가지고 회담장소를 빙빙 돌며 우리를 처치해버리자고 으르렁댔다.

나는 결국 20여 시간 동안 비행장에 감금당한 채 그들과 승강이를 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놈들의 주고받는 얘기와 눈치를 살피니 우리 비행기가 이륙하면 이내 저들의 전투기로 추격해서 공해상에서 추락시켜버릴 계획이었다. 나는 고공비행의 원칙도 무시하고 저공비행을 명하여 북위 42도선을 넘어 중국 산동성으로 기수를 돌렸다. 산동성 유현(遊絃)이란 곳에까지 와서는 가솔린이 떨어져 불시착을 했는데 그곳은 일본군들이 사용하던 비행장으로 아직까지 일군 2개 중대가 경비하고 있었다.(이범석, <광복군>)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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