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칼럼] 선글라스 썼을 뿐인데…그가 이상해졌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단어는 미국 SF 작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1984년에 발표한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깁슨은 이 단어를 ‘컴퓨터에 의해 제어되는’이라는 뜻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공간’의 ‘스페이스(space)’를 편집해 만들었습니다. 깁슨은 이 단어가 오늘날의 의미로 사용될 줄 몰랐다고 합니다. 전 세계 사람과 기계, 정보가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묘사하기 위해 뭔가를 암시하지만 구체적인 의미는 없는 단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깁슨의 책 ‘뉴로맨서’가 한국에서 번역된 때는 2005년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가상공간’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번역자는 영어 발음 그대로 ‘사이버스페이스’라고 옮겼습니다. 일본의 경우, 깁슨의 책은 1986년에 쿠로마루 히사시의 번역으로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번역자는 cyberspace를 ‘가상공간’이 아닌 ‘전뇌공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 이후 ‘전뇌공간’은 ‘가상세계’, 혹은 ‘가상공간’이라는 단어와 경쟁적으로 쓰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가상공간’이 사이버스페이스의 공식 번역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 ‘가상공간’이라는 단어가 문헌상 사이버스페이스 번역어로 확인된 것은 1996년입니다. 그러나 사이버스페이스가 ‘가상공간’으로 번역될 때,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가상’이라는 접두사 때문에 생기는 착각입니다. 정보처리, 제어, 네트워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 ‘cyber’가 마치 가상의 ‘virtual’처럼 인식되지만 사이버스페이스는 ‘가상’, 즉 ‘가짜’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더 치명적인 오류는 ‘공간’도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는 번역 문제가 아니라 영어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입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인터넷망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일 따름입니다. 사이버스페이스를 물리적 공간으로 동일시할 때, 사회적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할뿐더러 심각한 법적, 정책적 혼란까지 야기합니다. 정서적 혼란을 야기하는 문화 충격 또한 발생합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본질은 네트워크를 통한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작용에 있습니다. 이런 상호작용은 인류가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영역입니다. 전통적 ‘공간’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비물질성, 비선형성의 연결망입니다. 공간이 아닌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행동을 지배했던 원칙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립니다.
엘리아스가 주장한 ‘문명화 과정’의 산물인 눈맞춤, 시선, 신체적 접촉 원칙 등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수백년에 걸쳐 강력하게 작동하던 수치와 부끄러움, 예의와 품격 같은 행동 규범이 온라인에서는 약화되거나 무력화됩니다. 익명과 비대면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문명화 과정을 통해 구성된 ‘책임지는 개인’의 원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당연히 억제되던 언어폭력, 비아냥, 조리돌림, 집단 따돌림이 온라인에서는 수시로 발생합니다. 원시적 분노와 적개심 표출이 더 이상 부끄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 결과 이제까지 공동체를 유지해온 상호작용 원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사회적 신뢰도 붕괴됩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자기통제 붕괴, 상호 존중 약화 같은 현상을 학자들은 ‘탈문명화(Entzivilisierung)’로 설명합니다.
사이버스페이스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엘리아스는 독일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의 극단적인 폭력성을 경험하며 문명화 반대 과정, 즉 탈문명화를 주장했습니다. 탈문명화는 폭력과 분노 같은 원시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개인이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이들의 폭력적 행동에 자신을 정서적으로 동일시하는 특정 집단이 형성되고, 타자를 배제하는 폭력과 혐오가 일상이 되며 사회적 연대가 붕괴됩니다. 엘리아스는 문명화와 반문명화를 변증법적 과정으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문명화의 과정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다. 탈문명화의 과정 또한 존재한다.”
엘리아스의 ‘탈문명화’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폭력을 설명하는 데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네트워크로 펼쳐지는 무한한 연결 세계는 장밋빛 미래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발생한 정치적, 이념적 충돌은 수백 년에 걸쳐 확립된 문명의 원칙을 한순간에 무너뜨립니다.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적대시하여 조롱과 비아냥을 쏟아내는 데 특화된 인물들이 유튜브 스타가 되어 매일 같이 수천, 수만의 인터넷 영상을 쏟아냅니다.
비슷한 내용의 짧은 영상을 멈추지 않고 소개하는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는 이처럼 얽혀 있는 감정 배설에 아주 특화된 도구입니다.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종류의 ‘감시의 시선’에 지쳐 있던 이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전달되는 반문명적 언사에 열광하며 ‘클릭’으로 동조합니다. 이는 유사한 콘텐츠 제작을 부추기는 재정적 지원이 됩니다.
이제는 시선 통제가 불가능한 네트워크상 행동이 오프라인으로 확산됩니다.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도 분노와 적개심을 표현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네트워크의 최첨단을 달리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현상은 곧 발생할 전 세계적인 반문명화 과정의 전조입니다.
박정희의 ‘라이방’
시선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은 이미 오래전 오프라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시선을 숨길 수 있는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입니다. 사실 선글라스는 태양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도구입니다. 기원전 2000년 전에도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산업화, 도시화를 통해 대중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선글라스는 다른 기능을 위해 사용됩니다. 시선을 숨겨 자신의 의도와 감정이 읽히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12세기 무렵 중국 법관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연기로 착색된 안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감정 표현 차단’이라는 오늘날의 선글라스 기능이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시선을 거부당하면 무시당한 느낌이 듭니다. 의도하지 않게 시선이 읽히면 부끄러워집니다. 타인의 시선이 지속적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다고 느끼면 심한 두려움도 생기게 됩니다. 시험 시간에 감독 선생님이 교실 맨 뒤에 서 있는 경우입니다. 학생들은 내내 선생님 시선을 느끼며 긴장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 시험지를 교탁에 올려놓으며 뒤를 돌아보면, 선생님은 그저 창밖을 멍하니 보고 계셨습니다.
교실 맨 뒤 감독 선생님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 ‘선글라스’입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은 상대방을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은 그의 눈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푸코가 이야기하는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사이 권력적 비대칭 관계를 강화합니다. 둘의 상호작용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은 상대편에 비해 더 많은 권력을 가졌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듭니다. ‘보고 있지만, 안 보이는 듯한’ 묘한 익명성의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2010년 캐나다대 조직행동 전공의 첸 보 종(Chen-Bo Zhong) 교수팀은 선글라스가 가져오는 심리적 효과에 관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룹과 그러지 않은 그룹을 컴퓨터로 ‘독재자 게임(The Dictator Game)’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독재자 게임은 인간의 이타성, 공정성 인식 등을 탐구하기 위해 사회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실험 방식입니다. 한 사람은 독재자가 되어 주어진 돈을 상대방과 어떻게 나눌지 결정하고, 다른 사람은 결정된 금액을 받기만 하고 거절할 수 없습니다. 실험 결과, 피험자들은 선글라스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러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이기적으로 행동했습니다.
피험자들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것과 상관없이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익명성의 착각(illusory anonymit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익명성의 착각은 감정적 자기통제를 느슨하게 만들어 자기중심적 행동, 비윤리적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이는 어린이가 눈을 가리면 자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인지적 자기중심성(Cognitive Egocentrism)’과 유사한 현상입니다. ‘인지적 자기중심성’은 자신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이 세상을 보는 관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에서 논의됩니다.
선글라스의 심리적 효과를 한국에서 가장 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5·16 쿠데타 당시 기록 사진을 보면 군복을 입은 박정희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주변의 평범한 안경을 쓴 장교들과 확연히 구별됩니다. ‘너는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너를 보고 있다’는 시험 감독 선생님과 같은 방식의 권력 연출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로도 그는 공식 석상에 자주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착용하던 레이밴(Ray-Ban) 스타일 선글라스를 사람들은 ‘라이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라이방’은 한동안 ‘남자 권력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려도 문제지만, 상대방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주로 서양 사람과 대화할 때입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상대방의 시선을 느끼면 도대체 눈길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 눈맞춤은 지극히 제한된 상황에서만 허용됩니다. 실제 연구 결과가 그렇습니다.
2013년 일본 교토대 연구진은 핀란드와 일본 사람을 대상으로 눈맞춤과 관련한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양측 실험 참가자에게 중립적 표정의 얼굴 이미지를 제시했습니다. 감은 눈, 다른 곳을 보는 눈, 똑바로 앞을 보는 눈의 3가지 형태였습니다. 두 문화권 모두 직접적인 눈맞춤을 하는 얼굴에 더 강한 심박수 감소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보다 복잡한 인지적 처리 과정이 동원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지적 처리 과정의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일본 사람은 직접적인 눈맞춤을 한 얼굴을 더 화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당연히 일본 사람은 핀란드 사람에 비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을 더 접근하기 어렵고 불쾌하게 여겼지요.
몇 년 후, 방법론은 좀 더 가다듬은 연구가 시도되었습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중립적 표정의 얼굴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시선 방향을 지난번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바꿨습니다. 그 결과, 핀란드 참가자들은 일본인 얼굴보다 핀란드인 얼굴을 볼 때 상대방 시선을 더 정확히 판단했습니다. 5도나 10도 정도 어긋난 방향도 정확히 구별했습니다. 일본인 얼굴을 볼 때, 그 구별 능력은 떨어졌습니다. 서양인끼리는 상대방 시선에 매우 예민하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일본 참가자들은 약간 각도가 틀어진 시선도 직접적인 눈맞춤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핀란드인 얼굴이나 일본인 얼굴이나 오인 빈도는 별 차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일본인은 상대방 시선에 둔감하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일본 어린이들은 대화할 때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지 말고, 목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라고 교육받기도 합니다.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에서 필수적으로 작동하는 눈맞춤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문화적 의미를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문화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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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0호 (2025.05.21~2025.05.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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