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4년, 사라진 2만 명... 한국이 되살린 학살의 기록
[정승혜 기자]
|
|
| ▲ 뚜올슬랭 박물관 C동 외벽 철조망은 수감자들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설치된 것이다. 이 건물은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 독방과 집단 수용소로 사용됐다. |
| ⓒ 코이카 캄보디아사무소 |
'분노의 날'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다짐이자, 미래 세대에게 가르치는 성찰의 시간이다. 이 날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공연과 전시, 교육 프로그램이 열리며, 그 중심에는 프놈펜의 뚜올슬랭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을 이끄는 행 니사이 관장은 도슨트(해설사)로 시작해 16년째 이곳에 몸담고 있다. 캄보디아 국민들이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행 관장에게 물어봤다. 인터뷰는 5월 초 서면으로 진행됐으며, 추가 내용은 코이카 캄보디아 사무소를 통해 확인했다.
|
|
| ▲ 캄보디아 프놈펜의 뚜올슬랭 박물관 원래 고등학교였던 이 건물은 1975년부터 S-21 수용소로 사용됐다. 사진은 고문과 자백, 집단 수용이 벌어졌던 건물 외벽의 현재 모습이다. |
| ⓒ 코이카 캄보디아사무소 |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75년 4월에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급진 공산주의 무장 세력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시작됐다.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다며 도시를 비우고 지식인, 종교인, 장애인, 소수민족 등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불과 4년 만에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인 170만 명 이상이 학살과 기아, 강제노동으로 사망했다.
뚜올슬랭 박물관은 원래 평범한 고등학교였으나, 1975년 전국 200여 개 수용소 중 하나인 'S-21 수용소'로 전환됐다. 웃음이 넘쳤던 교실은 고문실이 되었고, 분필은 채찍으로, 칠판은 자백서로 바뀌었다.
행 관장은 "1979년 1월,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이곳을 거쳐 간 약 2만 명 중 생존자는 12명이었다"며 "성인 8명, 어린이 4명뿐이었다. 그 참혹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건물 외벽에는 여전히 철조망이 감겨 있고, 땅에는 피로 얼룩진 흔적이 남아 있다. 자살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감방, 그리고 지금도 문틈마다 배어 있는 절규. 잔혹함은 벽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행 관장은 "이곳은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애도의 공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두 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될 교훈의 장이다"라며 "매년 40만~50만 명이 이곳을 찾고, 그중 80%는 외국인이다. 낯선 나라의 학살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 이 아픔이 더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기억을 지키는 힘
박물관은 최근 유네스코와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와 함께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코이카는 단순한 기술 지원자에 머물지 않았다. 전쟁과 폭력으로 사라진 기록을 복원하고, 그 기억을 세상이 잊지 않도록 디지털에 새겼다.
2014년부터 7년에 걸쳐 수감자 전기, 자백서, 사진, 선전물 등 약 75만 건의 자료를 보존하고, 50만여 건을 디지털화해 크메르어와 영어로 공개했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구축된 이 기록은 단순한 이미지 파일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목소리이자 역사의 증언이다.
행 니사이 관장은 "박물관에 보존된 수많은 문서들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고, 특히 종이 자료들의 보존이 시급했다"며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완료됐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회상했다. 그의 말처럼, 이 기록들은 단순히 과거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자들의 목소리이자, 침묵 위에 세워진 역사의 증언이다.
|
|
| ▲ 투올슬랭 박물관 아카이브 복원실에서 진행 중인 문서 보존 작업 |
| ⓒ 코이카 캄보디아사무소 |
"이 문서에 적힌 이 사람이, 제 어머니일지도 모릅니다."
이름도 사진도 없이 사라진 이들을 향해, 유족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이름도 사진도 없이 사라진 이들을 향해, 단서 하나 없는 유족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속 한 줄의 기록이, 누군가에겐 가족의 생사로 이어지는 유일한 끈이다.
그는 "2016년까지만 해도 가족을 찾는 문의는 거의 없었지만, 2024년엔 34건, 2025년 5월 현재까지 16건이 접수됐다"며 "연구자들의 열람 요청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디지털 아카이브는 단순한 보관이 아니다. 거짓이 진실을 덮기 쉬운 시대에,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살아 있게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교육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기억은 현재의 책임이다
5.18 민주항쟁 등 국가폭력을 경험한 우리에게 이 메시지는 결코 낯설지 않다. 전쟁과 내전, 정치적 폭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지난달, 한국의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 사건인 제주 4.3 사건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 남긴 증언과, 진실을 밝히기 위한 유족들의 오랜 노력이 국제사회로부터 그 역사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현재 뚜올슬랭 박물관은 2차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 중이며, 쩡아익 집단학살터와 M-13 수용소 등을 포함한 캄보디아 추모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코이카와 함께 추진하고 있다.
뚜올슬랭 박물관은 이제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이 아니다. 다시 떠올리기 힘든 아픔일지라도, 우리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분노의 날'은 캄보디아의 상처를 넘어, 인류 모두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경고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전 세계 시민의 약속, 그 다짐은 지금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ACN아시아콘텐츠뉴스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것은 사법부의 '굴욕'... 함정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하라
- 만삭 몸으로 자격증 따자 돌아온 말 "여자는 남자 갈비뼈로 만든 거 몰라요?"
- 김건희 때는 뭐하고? 국힘 "김혜경·설난영 TV토론" 제안
- "190석 민주당, 탄핵 발의 30번" 김문수 선거공보 오류
- 대통령 잘못 뽑아서 벌어진 일... 엄청난 문제 떠안은 차기 정부
- [오마이포토2025] '어른' 김장하가 노무현에게 남긴 다섯 글자
- 대선 14일 앞둔 TK 민심, 이재명 31.2%-김문수 54.2%-이준석 8.2%
- [오마이포토2025] 김장하 선생과 만난 권양숙 여사
- [오마이포토2025] 점퍼 열어 보인 김문수 "저는 방탄조끼 입지 않았다"
- 이진우 전 사령관 "대통령, '본회의장서 네 명이 한 명씩 들고 나오라' 지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