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었다면 뉴스 나올 일, 스페인에선 아무도 신경 안 쓰네

김성수 2025. 5. 2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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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테벤투라 5일간의 유쾌한 충격, '자유'를 깨닫다

지난 35년간 영국에서 살고 있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 자녀들은 초·중·고·대학교를 영국에서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나는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그러면 지난 달 아내와 함께 방문한 스페인 방문기를 나누고 싶다. <기자말>

[김성수 기자]

옷이 아니라, 시선과 잣대를 벗다

영국에서 햇빛은 '희소자원'이다. 하루 종일 구름 낀 하늘 아래 살다 보면 표정도 흐려지고, 마음의 체감 온도는 늘 낮다. 그래서일까. 아내가 어느 날 말했다.

"햇볕 있는 곳으로 가자."

나는 주저 없이 외쳤다.

"스페인!"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지난 달 스페인으로 향했다.

햇빛의 여왕, 로라 씨를 만나다
 푸에르테벤투라에서
ⓒ 김성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중 하나인 푸에르테벤투라(Fuerteventura). 이름부터 강렬하다. 스페인어로 '강한 행운'이라는 뜻이라는데, 우리에겐 예상치 못한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준 섬이었다.

공항에서 우리를 맞아준 관광안내원 로라 씨는 런던 출신 영국여성이었다. 20년 전, 이 섬에 휴가 왔다가 정열적인 스페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눌러앉았다고 했다.

"런던엔 비밖에 없었어요. 이제는 햇살 없는 인생은 상상도 안 돼요."

그녀의 얼굴은 이미 스페인 태양처럼 환했다.

알고 보면 유럽 최고의 '벌거벗은 유산'

푸에르테벤투라는 카나리아 제도 중에서도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아프리카 서쪽, 모로코 해안에서 불과 100km 거리에 있어,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자랑한다. 덕분에 '유럽의 하와이'라 불리며, 특히 유럽의 누디스트 사이에서는 '성지'로 통한다.

이 섬의 매력은 자연뿐 아니라 역사에도 있다. 약 2000년 전, 북아프리카 베르베르계 토착민들이 처음 정착했고, 15세기 스페인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옛 수도였던 베탄쿠리아(Betancuria)는 스페인 초기 정착촌의 흔적을 간직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1404년에 건설된 산타 마리아 교회와 백색 벽의 가옥들은 꼭 한 번 거닐어볼 만하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해방'의 현장

둘째 날, 숙소 근처 해변을 걷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쳤다.

"여보… 저 사람들 옷 입은 거 맞지?"

그들은 그냥 안 입은 상태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수십 명 되는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인' 상태로 해변을 누비고 있거나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당황했고,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옷을 다 벗었는데도, 왜 우리보다 당당해 보였을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자유는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공원에서 만난 자연주의 신사

이튿날, 해변 인근 공원을 산책하다가 또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중년의 한 남성이 나무 옆에 쭈그려 앉아 아주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한국이나 심지어 영국이었더라도 민원부터 지역뉴스까지 났을 일이다. 그런데 여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놀라는 게 더 이상한 눈치였다.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살바도르 달리가 봤으면 초현실주의 새 그림 하나 나왔겠다."

푸에르테벤투라의 '자연주의'는 정말 철저하게 자연스러웠다.

반드시 들러야 할 그 섬의 보석들

우리는 로라씨의 추천으로 섬 곳곳의 매력을 조금씩 맛볼 수 있었다. 북부의 코랄레호(Corralejo)는 도시보다는 마을에 가까운 한적함이 매력이다. 바로 옆에는 사하라 사막을 연상케 하는 코랄레호 자연공원(Corralejo Natural Park)이 펼쳐진다. 광활한 백사장과 모래언덕은 말 그대로 '벌거벗은 자유'를 만끽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코스타 칼마(Costa Calma)와 소타벤토(Sotavento) 해변이 나온다. 이곳은 세계 윈드서핑 챔피언십이 열리는 명소로, 바람과 파도를 사랑하는 이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수영복보다는 바람막이가 더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배꼽티 입은 할머니의 품격

이 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거리에서 배꼽티를 입고 활보하는 할머니들이었다. 주름도, 군살도, 시선도 개의치 않는 그들의 태도는 그 자체로 멋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물었다.

"장모님도 저렇게 입으시면 어떨까?"

아내 답변이 걸작.

"영국은 쌀쌀해서 엄마 감기 드셔"

아내 대답이 찬성인지 반대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그들은 단순히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진짜 멋있었다.

햇살처럼 따뜻한 사람들

푸에르테벤투라의 또 다른 매력은 사람들이었다. 식당에서, 마트에서,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정했고, 여유로웠다.

"마냐나!(mañana)"

이 한 단어에 스페인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내일 해도 괜찮고, 지금은 지금대로 괜찮은 삶. 우리는 그 여유에 물들었고, 점점 마음의 무장도 풀렸다.

다시 부슬비의 나라로

5일간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 아내가 물었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음엔 수영복 한 겹 덜 입고 와볼까?"

아내는 대꾸했다.

"당신 먼저 해봐."

비행기 창밖으로 다시 흐린 하늘이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이 섬은 우리에게 단지 햇빛과 해변을 준 게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켜준 곳이었다. 벗고 싶은 건 옷이 아니라, 시선과 잣대일지도 모른다.
 푸에르테벤투라 해변에서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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