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배재에서 ‘자유’ 배운 이승만, 왕 선출하는 나라 건국
정동 배재학당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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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회 열어 반향 부른 서재필 만나
쟁취해 얻는 적극적 자유 개념 눈 떠
공과 논란 있지만 건국 지도력 발휘
한국전 후 미국 압박 방위조약 관철
4·19 부상 학생 만난 후 깨끗이 하야
장제스가 위로하자 “미래 밝다” 답신
」
서재필 “토론문화 없어 갑신정변 실패”
![서울 정동의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916년 준공돼 배재학당 동관으로 쓰인 근대 건축물이다. [사진 김정탁]](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0/joongang/20250520002627119bewp.jpg)
배재학당에선 영어·천문·지리·생리·수학 등을 가르쳤는데 그간 향교나 서당에서 가르친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또 연설회나 토론회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는 방법을 지도하고, 정구·야구·축구 등 운동도 익히게 했다. 개교 2년째부터는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고 곧이어 정규 과목으로 가르쳤다. 미국서 의사가 돼 귀국한 서재필은 특강을 나가 토론회를 조직했는데 찬반으로 나눠서 토론시키자 학생들의 반향이 컸다. 토론회를 조직한 건 조선은 아래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해서다. 이런 토론문화가 없어 갑신정변도 실패했다고 봤다.
개교 10년째인 1895년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20살의 나이로 입학했는데 과거시험에 떨어진 직후다. 그가 낙방한 과거는 프랑스 첫 유학생 홍종우가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치러진 거라 사실상 홍종우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런데 곧 이은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승만은 영어를 배우려는 생각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해 반년 만에 쌀 두 가마니 월급을 받는 신입생 담당 영어교사가 되었고, 졸업식에선 졸업생을 대표해 영어로 ‘조선의 독립’에 대해 연설했다.
![배재학당이 첫 서양 근대식 학교였음을 알리는 ‘신교육의 발상지’ 표지석. [사진 김정탁]](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0/joongang/20250520002628555rnme.jpg)
이승만은 영어뿐 아니라 토론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학교 내에 협성회라는 모임이 결성되자 여기서 50여 차례의 토론회를 통해 토론의 달인으로 거듭났다. 이 모임이 독립협회의 모태가 되면서 토론회는 독립협회 주최로 열렸는데 열릴 때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청년, 학생, 젊은 관료 등이 참여하는 공개토론회가 종로 보신각 등지에서 열리자 사람들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열광했다. 그리고 조선이 처한 현실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민의의 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이때 이승만은 공개토론회의 스타였다.
그렇더라도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서재필과 만남이다. 그에게서 ‘freedom’의 개념을 처음 접해서다. liberty와 freedom은 자유로 똑같이 번역돼도 의미상에선 차이가 크다. liberty는 태어나면서 얻어지는 소극적 자유인 데 반해 freedom은 쟁취해서 얻어야 하는 적극적 자유여서다. 그러니 조선에서 수명을 다한 왕정이 무너지려면 freedom의 정신이 요구된다. 이 개념에 눈을 뜨자 이승만은 마음에서 혁명이 일어나 그동안 요순시대만 유토피아인 줄 알았는데 ‘왕(대통령)을 선거로 선출하는’ 미국 같은 나라도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 [사진 김정탁]](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0/joongang/20250520002630247wgsh.jpg)
그의 나이 30살 때인 1905년 미국에 유학할 기회를 얻자 하버드대에서 사학으로 석사를,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를 취득해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그런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미국에 남아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귀국해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해 1948년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정권연장과 관련해 과오도 있었지만,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같은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1960년 부정선거로 4·19의거가 일어나자 하야해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90세로 사망했다.
그의 공과를 두고 논란이 여전해도 그가 건국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탄생이 과연 가능했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1945년 이후에 독립한 신생국가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만큼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이룬 나라가 없음을 감안하면 그가 건국 과정에서 보여준 지도력은 마땅히 평가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도 잦은 마찰을 빚은 게 사실이다. 당시 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좌우 이념 충돌로 인한 정국 혼란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중도파인 김규식을 밀어서다. 이는 순진한 발상인데 그랬더라면 남한도 공산 치하가 되지 않았을까?
또 한국전을 수행하면서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미국으로부터 그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을까? 미국의 이런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꺾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이 친미적이라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어낸 건 아니다. 그는 미국 편이라기보다 미국을 활용할 줄 아는 정치인이어서 친미(親美)주의자가 아니라 용미(用美)주의자다. 이 때문에 한국전을 수행하면서도 한국과 미국 사이에 외교적 긴장은 예상외로 팽팽했다. 미국은 한국전을 조기에 끝내려고 했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받지 않고선 끝낼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텨서다.
종전 움직임에 반공포로 석방해 버텨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뜰에 있는 아펜젤러 동상. 배재학당을 설립한 그는 1902년 타고 있던 목포행 배가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하자 물에 빠진 정신학교 여학생을 구하려다 44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사진 김정탁]](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0/joongang/20250520002631655smub.jpg)
이런 버팀에도 한계가 있자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회심의 카드를 던졌다. 이 조치가 미국과 사전에 협의 없이 단행되자 미 정부가 받은 충격은 컸다. 그렇지만 제네바 협정과 인권보장의 제 원칙상 반공포로는 적 포로와 교환되지 않고 석방돼야 한다는 명분에서 미국은 이승만에게 밀렸다. 그러자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는데 동시에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 레디(Ever-ready)’ 작전도 수립했다. 이는 유엔군 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이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국이 주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1954년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에 회담장 분위기가 어색해졌는데 이승만은 다음날 예정된 내셔널프레스센터 기자회견 준비를 이유로 백악관을 일방적으로 떠났다. 회담장에 있던 한국 측 대표의 전언에 따르면 아이젠하워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승만의 이런 행동은 금 년 초 젤린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당한 수모와 크게 비교된다.
![서울 이화장과 이승만 동상. 승만(承晩)은 ‘늦음을 받들다’라는 뜻인데 원래 이름은 어머니가 천일기도 끝에 용꿈을 꿔 낳았다고 해서 승룡(承龍)이었다. [사진 김정탁]](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0/joongang/20250520002633023arot.jpg)
이승만은 결국 미 정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대한민국은 안보상의 위험을 해소하고 경제 성장에만 집중해 지금과 같은 번영을 이뤄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가까이서 목격한 당시 미국 부통령 닉슨은 그의 회고록에서 ‘노 대통령의 슬기(The wisdom of old President)’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자세히 언급한다.
![이화장 안의 조각당. 여기서 대한민국 정부 첫 내각 명단이 만들어졌다. [사진 김정탁]](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0/joongang/20250520002634342oxfx.jpg)
이승만은 4·19 직후에도 병원을 찾아가 다친 학생들을 위문하면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라고 격려했다. 또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고 말한 뒤 깨끗이 하야했다. 그리고 하야 직후 타이완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으로부터 위로 편지를 받자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고,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이 있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라의 미래는 밝다”라고 답신했다.
프리덤 정신 하야에 영향 끼쳤을 수도
이 말들은 이승만의 진심이라 본다. 이는 젊은 시절 배재학당에서 freedom의 정신을 체득해서가 아닐까? 그런데 아이젠하워 정부는 그의 이런 진심을 역이용해 하야 및 망명을 교묘히 유도한 게 아닌지. 이 과정들이 석연치 않아서다. 1955년 월남에서 정변을 통해 고 딘 디엠 친미정권이 들어서고, 1961년 카스트로 정권에 반대해 쿠바를 침공하고,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무너진 일에 미 정부의 공작이 있어서다. 그렇다면 미국은 자신의 양면성을 다 보여줌으로써 이승만과 상생일 때는 동반자이면서 상극일 때는 가해자였던 게 아닐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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