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진짜 필요해? 아내가 쓰면 되잖아"

박혜형 2025. 5. 1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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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시간 근무제와 워라밸 시대의 가족 역할

[박혜형 기자]

"주 52시간 근무제로 저녁이 있는 삶이 왔다."

화려한 구호 뒤에 숨은 현실은 어떨까? 한국의 직장인들, 특히 일과 가정을 동시에 책임지는 부모들에게 52시간 근무제는 약속된 행복을 가져왔을까?

직장인 김 과장의 표정은 무겁다.

"52시간 꼼수 쓰는 회사들 때문에 오히려 더 피곤해졌어요. '자발적 야근'이라는 환상적인 단어가 생겼죠. 강제는 아니지만 안 하면 성과평가에서 불이익..."

"6시면 불이 꺼져요, 문제는 그후부터예요"

2018년 도입된 52시간 근무제는 5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워킹맘과 워킹대디들은 여전히 딜레마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특히 맞벌이 부부에게 제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더욱 깊게 느껴진다. 공식적으로는 52시간을 지키지만, 비공식적으로는 24시간 대기 상태인 직장인들의 모습이 한국형 워라밸의 현주소다. 한 직장인은 "제 직장은 6시면 불이 꺼져요. 완벽한 52시간 준수! 문제는 그 후부터죠. 카톡, 이메일, 팀즈 메시지가 새벽까지 울려요"라고 토로한다. '지금 확인 안 해도 돼요'라는 말과 함께 오는, 암묵적인 기대감. 다음 날 '어제 제 메시지 못 보셨나요?'라는 수동공격적 질문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 노동시간은 여전히 OECD 평균을 훨씬 웃돈다. 2022년 기준 연간 1,915시간으로 OECD 평균 1,716시간보다 약 200시간 많다. 독일(1,340시간)과 비교하면 한국인은 연간 약 575시간, 즉 3개월 이상을 더 일한다.

팬데믹은 일하는 부모들에게 양날의 검이었다. 한편으로는 출퇴근 시간을 절약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과 가정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화상회의 중 갑자기 뛰어들어온 아이를 마주한 순간,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이중적 정체성이 모든 동료에게 노출되는 경험을 했다. 사무실에서 유지하던 전문가다운 페르소나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별에 따른 경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맥킨지의 2021년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기간 여성의 25%가 경력 축소나 퇴직을 고려했지만, 남성은 그 비율이 17%에 그쳤다. 가정 내 무급 노동의 불균형이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악화된 결과다.

모성엔 벌칙, 부성엔 보너스... 냉혹한 한국 직장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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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직장 문화의 냉혹한 현실 중 하나는 '커리어 벌점 제도'다. 공식적인 제도는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이 시스템은 특히 육아를 선택한 직원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복귀한 많은 직장인들이 경력 단절을 이유로 승진에서 배제되거나 중요 프로젝트에서 제외되는 경험을 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등 국내외 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동일한 능력과 경력을 가진 여성이라도 자녀가 있으면 임금에서 불이익을 받는 '모성 페널티(Motherhood Penalty)'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남성은 자녀가 있을 때 오히려 임금이 높아지는 '부성 보너스(Fatherhood Bonus)' 현상이 보고되었다. 이처럼 자녀 유무에 따라 남녀 임금 격차가 발생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성별 고정관념과 노동시장 구조의 문제를 보여준다. 남성의 육아휴직 신청 시 "진짜 필요해? 아내가 쓰면 되잖아"라는 반응은 여전히 존재한다. 짧은 육아휴직 기간에도 "열정이 식었다"는 평가를 받는 현실이 남성들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최근 흥미로운 변화가 가정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MZ세대 남성들의 육아 참여도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높아진 것이다. 한 교사는 X세대인 남편과 MZ세대인 동생의 남편을 비교하며 "우리 남편은 주말에 아이 데리고 나가는 것도 '특별한 이벤트'처럼 여기지만, 동생 남편은 육아 관련 앱도 깔고 이유식 레시피도 직접 찾아본다"고 말한다. 최근 통계청 및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30대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 증가율이 40~50대 남성의 두 배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대 교체만으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희망적인 신호다.

오래 일하는 것 아닌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하느냐로 평가

한국의 워킹맘과 워킹대디가 마주하는 도전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자주 북유럽 국가들을 모델로 삼는다. 그러나 문화적 맥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제도만 도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아이슬란드는 세계 최초로 '3-3-3'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했다. 부모 각각에게 3개월씩 할당하고, 나머지 3개월은 부부가 자유롭게 나눠 쓸 수 있는 방식이다. 이로써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이 90%를 넘는다. 하지만 제도의 단순한 복사만으로는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회사가 공식적으로 남성 육아휴직을 장려하면서도 실제로는 "승진 포기"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화적 괴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성과 기반 평가' 시스템을 도입해 시간이 아닌 결과물로 직원을 평가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자리에 오래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하는지'가 중요해진다. 외국계 회사로 이직한 한 직장인은 "3시에 아이 하교 픽업을 위해 나가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며 "대신 내 성과 지표는 명확하고, 그걸 달성하면 인정받는다"고 말한다. 한국 회사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성과 기반 평가는 특히 워킹맘에게 유리하다. 연구에 따르면, 출산 후 여성들은 시간 관리와 업무 효율성이 오히려 향상되는 경향이 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이 '효율적인 직원'이 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가족 내 역할 분담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도 등장하고 있다. '공동양육자(Co-parenting)'를 넘어 '공동생활자(Life partners)' 개념이다. 이는 단순히 육아 책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정 내 모든 영역에서 동등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커플들은 회사 프로젝트를 계획하듯 매주 '가족 회의'를 통해 다음 주 스케줄과 역할 분담을 논의한다. 이런 접근법은 단순한 '공평함'을 넘어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각자의 강점과 약점, 스케줄을 고려해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변화 위한 다양한 시도

한국에서도 변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다.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는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근로자가 주 15-35시간으로 근무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현실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업무량은 그대로인 채 시간만 줄어드는 경험을 한다. 또한 단축근무 중인 직원들은 중요 프로젝트에서 제외되거나 '시간제 근무자'라는 레이블이 붙어 점점 주변화되는 경험을 한다. 특히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인력 대체가 쉽지 않아 제도 자체를 활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제도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많은 근로자의 고충이다.

일부 국가와 기업들은 더 과감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뉴질랜드, 영국 등에서 진행된 '4일제 근무' 실험은 놀라운 결과를 보여줬다. 생산성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증가했고, 일-가정 균형과 직원 행복도는 크게 향상됐다.

독일의 '부모연금(Parent Pension)' 또는 '출산 크레딧' 제도는 자녀를 키운 부모에게 연금 포인트를 추가로 제공한다. 이는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이 노후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하는 장기적 접근법이다. 한국에도 육아 시간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하는 '출산 크레딧'이 있지만, 아직 인지도가 낮고 혜택도 제한적인 상황이다. 육아의 사회적 가치를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이런 제도의 강화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워킹맘과 워킹대디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영역에서 균형 잡힌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시간의 질적 전환이다. 52시간만 지키는 표면적 변화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업무 시간의 양과 질을 동시에 중요시하는 문화로 나아가야 한다. 결과만 쫓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의 협업과 창의성, 직원 웰빙도 동등하게 가치 있게 여기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업무 시간에는 깊은 몰입을, 개인 시간에는 온전한 분리를 가능하게 하는 경계의 명확성이 중요하다.

둘째, 인식의 균형적 변화다. 육아와 가사는 '돕는 것'이 아닌 '함께 책임지는 것'이란 관점이 사회 전반에 정착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교육과 미디어, 기업 문화를 통한 장기적 변화 과정이다. 직장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남녀 모두가 동등하게 평가받고, 경력 단절이 아닌 경력 전환의 기회로 인식되는 문화적 토대가 필요하다.

셋째, 포용적 제도 발전이다. 제도는 현실을 반영하고, 다양한 가족 형태와 직업 환경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에서 벗어나 중소기업, 비정규직, 프리랜서 등 모든 일하는 부모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포용적 정책이 필요하다. 자녀의 연령과 상황에 맞는 맞춤형 지원 시스템, 육아휴직 활성화를 위한 기업 인센티브, 가족 친화적 조직 문화를 위한 평가 및 인증 강화 등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 변화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제도만 바뀌고 인식이 바뀌지 않거나, 인식은 변했지만 시간 활용 방식이 그대로라면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하는 부모들이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된 자아로 살아가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결국 양쪽 모두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과거 회귀는 없다

진정한 워라밸은 일과 삶을 대립항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의미한다.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지 5년, 우리는 여전히 과도기에 있다. 제도적 변화는 시작됐지만, 문화적 혁신은 아직 진행 중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로의 회귀는 없다는 점이다. 워킹맘과 워킹대디들이 둘 다를 포기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개인의 행복을 넘어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다.

어쩌면 진정한 워라밸의 시작은 "워킹맘"과 "워킹대디"라는 용어 자체가 필요 없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저 "부모"와 "직장인"이라는 역할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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