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모든 사람과 싸우는 진상, 집요하게 쫓던 카메라가 멈춘 곳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진상. 그 말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성격파탄자란 말로는 부족하다. 굳이 멀리까지 나다니며 걸지 않아도 된 시비를 걸어댄다. 날 선 독설과 위협적인 표정, 어디 한 번 해보자는 기세는 덤이다. 가게 점원, 뒤로 줄 선 다른 손님, 치과 의사는 물론이고 휴가 간 주치의 대신 나온 의사, 심지어는 제 머리를 해주러 온 미용사 동생과 남편, 하나뿐인 아들에 대해서까지,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진상을 떨어댄다. 그녀와 말 섞는 사람치고 싸우지 않는 사람이, 싸우더래도 좋은 꼴을 볼 이가 없을 정도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스 섹션 상영작 <내 말 좀 들어줘>는 개진상 중의 상진상 팬지(마리안 장 밥티스트 분)의 이야기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마이클 리의 카메라가 팬지의 며칠을 뒤따르며 그녀의 좌충우돌 진상행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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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 ⓒ JIFF |
리의 시선은 이번에도 무심한 듯 진중하다. 그는 섣불리 개입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 자세를 견지하며, 또 예의 그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팬지의 며칠을 지켜본다. 첫 희생양은 뚱땡이 아들 모지스(튜웨인 바렛 분)인데 방을 치우지 않는 것부터 22살이 되도록 취업은커녕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 등등 온갖 이유로 융탄폭격을 맞는다. 아들은 아예 대거리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방으로 황급히 대피한다. 그러나 그 방조차 안전지대는 되지 못하니 그대로 얼어붙을 뿐.
퇴근 후 들어온 남편(데이비드 웨버 분)이라고 다르지 않다.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왔다는 것부터 곧장 뒷마당에 있는 창고로 직행하려 들었단 것까지 하나하나 이유가 된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 팬지 곁에 앉아 시중을 들으려 했대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란 확신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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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 ⓒ JIFF |
<내 말 좀 들어줘>가 특별함을 얻는 지점은 팬지의 동생 샨텔(미쉘 오스틴 분)이 나오는 순간부터다. 영화는 팬지와 가족, 그녀의 일상을 샨텔과 가족, 그녀의 일상과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한 배에서 나온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둘은 용모부터 성격까지 너무나 대조적이다. 팬지가 앞서 적은 바와 같다면, 샨텔은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이다. 남편 없이 사는 그녀에겐 두 딸 카일라(애니 넬슨 분)와 알레이샤(소피아 브라운 분)가 있는데, 그 사이가 더없이 밝고 긴밀하다. 이들 셋은 마치 단짝 친구처럼 서로를 신뢰하고 북돋는다. 서로의 삶 가운데 꿈과 고난이 자리한 건 두 가정이 마찬가지겠으나, 팬지의 집엔 활력도 연대도 없는 반면, 샨텔의 집은 그렇지 않다.
영화는 샨텔이 팬지에게 거듭 손을 내밀고 다가서는 모습을 우애 깊은 자매의 그것처럼 비춘다. 팬지의 전투력과 그녀가 다른 이들에 비해 몇 수나 접어주고 있긴 하지만 결코 만만찮은 태도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만큼 샨텔은 꾸준하고 집요하게 그녀에게 다가선다. 리는 그 이유도, 둘 사이 깔린 사연도 분명히 드러내지 않지만 현상만큼은 확실히 보여준다. 둘 사이엔 어찌됐든 관계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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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 ⓒ JIFF |
<내 말 좀 들어줘>는 종잡을 수 없는 영화다. 이렇다 할 대단한 서사, 즉 기승전결에 이르는 위기와 극복, 도전과 성취의 이야기는 자리하지 않는다. 리의 카메라는 집요하고 은근하게 팬지와 샨텔을 비출 뿐이다. 폭발하고 사그라들다 또 다시 폭주하는 팬지와 그에 짓밟히고 부숴지는 주변인의 모습으로부터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 또 관객은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 어쩌면 그야말로 영화가 진정으로 내보이려 하는 건 아닐까.
근래 개봉한 영화 가운데 <나미비아의 사막>이란 작품이 있다. 카나(카와이 유미 분)란 젊은 여성의 삶을 가까이 비추는 영화는 특별한 사건 대신 될 대로 흘러가는 그녀의 시간을 뒤따른다. 거기엔 매일 성실하게 출근하고 퇴근하지만 마음은 두지 않는 일자리가 있고, 두 남자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책임한 연애가 있으며,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탱하는 삶이 있다. 스스로를 챙기지 않는, 그보다는 포기한 것에 가까워보이는 무력함도 있다.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기에 기대하지 않는 무기력함,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무능함도 강하게 엿보인다. 영화는 그녀를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으며, 또 섣불리 판단하지도 않은 채 가만히 비춘다. 그리고는 끝까지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서 끝을 맺는다. 판단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하나의 판단이라는 양. (관련기사 : 방황하던 이 청년의 선택... 사회 탓만 하는 영화가 불편했다 https://omn.kr/2dfw5)
<내 말 좀 들어줘>를 보는 내내 <나미비아의 사막>이 떠오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에 이를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량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현상과 결과만 나열하며 그조차 충실히 발전시키려 들지 않는다. 해소 또한 물론 없다. 샨텔의 노력도, 카나와 애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끝없는 갈등, 판단에 이르지 못할 사실들, 해소되지 않는 문제가 지속될 뿐이다. 영화 속 치과의사며 의사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팬지를 진찰조차 할 수 없듯이, 영화를 보는 관객 또한 그녀의 상황에 나름의 해석을 내놓을 수 없다. 리는 그와 같은 판단을 철저히 불가능하도록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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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 ⓒ JIFF |
나는 이와 같은 연출을 일견 무책임하다고 여긴다. 두 시간 내외의 영화 가운데서 펼쳐낸 이야기를 나름대로 수습할 수 있도록, 관객에게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통제하는 게 제가 하고자 하는 작업이라는 듯 구는 영화가 있다면 어떨까. 이 두 작품이 그와 같아서 좀처럼 리와 야마나카 요코의 작업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리의 영화는 여러모로 야마나카 요코의 작품보다는 낫다. 요코의 영화가 '모르겠다' 그 자체를 대사로, 또 장면들로, 나아가 구성 그 자체로 드러내고 침몰한다면, 리의 영화는 끝까지 '모르겠다'는 해설조차 더하지 않는 때문이다. 그로써 영화는 팬지라는 인물을 끝까지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겨둔다. 그녀 안에 깔린, 남편이며 아들, 또 동생과 죽은 엄마와의 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둔 채로,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의 인간이 끝끝내 그에 접근할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채로 그녀의 폭격 앞에 놓일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도록 한다.
어떤 존재는 끝끝내 구덩이에서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일까. 적어도 팬지와 그 남편의 경우엔 그런 것이다. 모르겠다가 아니라 불능, 내 영화와 마주한 관객 너도 해소할 수 없고 다가설 수 없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 <내 말 좀 들어줘>의 뒤에 남겨지고 만다.
같은 이유로 영화제가 번역한 제목 '내 말 좀 들어줘'는 부적절하다. 원제 'Hard Truths'가 가리키는 바, 가 닿기 어려운 진실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바에 가깝지 않은가. 팬지는 이런 류의 영화가 흔히 그러하듯, 제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흔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의 불통은 그보다 훨씬 더 깊다. 그녀의 분노도, 아픔도, 실망도 그러하다. 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할 테다. 들어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능, 그 자체를 말한다. 그래서 더 아프고 현실적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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