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정상에선 볼 수 없고 사라오름에선 볼 수 있는 것
2025년 4월 24일부터 7일간 제주 트레킹한 기록입니다.
<기자말>
[안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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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한라산이 있음으로 해서 섬이 생겼고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주는 한라산의 일부이다. 제주의 모든 것은 한라산으로 집중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아주 오래전 용암으로 들끓던 한라산은 이제 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며 육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요즘은 외국 관광객도 부쩍 늘어났다.
한라산 굼부리는 거의 완벽하게 타원추의 꼭짓점에 위치하고 있다. 평면적으로 보면 피라미드 형태와 흡사하다. 굼부리의 위치가 조금만 기울어졌다면 남태평양의 군도나 하와이 군도의 여러 섬처럼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이스트 섬을 보더라도 분화구는 아예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라산의 이런 기하학적 균형은 대자연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것도 부족해 대폭발 후 새끼화산을 만들어 지형의 다양성을 창출하였고 그곳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당한 공간이 되었다.
이날 가야 할 트레일은 바로 한라산 굼부리와 가깝게 접해 있는 사라오름이다. 당초 사라오름은 이번 계획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나 트레킹 도반 중 한 명이 그 오름을 강력하게 추천하여 마지막에 결정하였다. 이번 제주 트레킹의 본래 취지 중에 하나가 가능하면 한라산 정상부에 가깝게 접근한 트레일을 배제하는 것이었는데, 이 결정으로 인해 다른 도반이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사라오름은 해발 1,324미터이고, 정상인 동봉으로부터 3.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한라산이 보듬고 있는 오름 중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오름이 윗세오름이지만, 물을 담고 있는 오름은 사라오름이 유일하다. 날씨에 따라 오히려 백록담보다 더 많은 물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잘 마르지 않는다.
대다수의 등산객들은 한라산 백록담에 만 집중할 뿐 이 사라오름의 존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대개 하산하면서 잠시 들러야 하는데 표고차 100미터를 극복하기엔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엄두를 못 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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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4월 26일 성판악에서 한라산 등산로 |
| ⓒ 안호용 |
이에 몇 년 전부터 예약제로 바뀌어 약 두 시간 간격으로 2~3번에 나누어서 등산객들을 분산 출입시키기 시작했고, 하루 출입 인원을 2,000명 이하로 조절하였다. 그리고 자연보호 차원에서 윗세오름과 남벽에서 넘어오는 코스도 차단하였다. 한편으론 불편하지만 한라산국립공원의 이런 극약 처방은 충분히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한라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로부터 수난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상대적으로 예약자가 가장 적은 마지막 타임에 예약한 나와 일행은 텅 빈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길은 데크와 코코매트를 깔았고, 경사각이 큰 길엔 단단한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발자국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몸부림이 처절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보호 차원의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길은 교통호처럼 깊게 파이고 무너질 것이다. 더구나 한라산 특유의 거대한 폭우가 퍼부을 경우엔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육지처럼 자연휴식년제를 적용시키는 것은 제주도의 관광 수입 감소가 물 보듯 뻔하기 때문에 섣불리 시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틈을 노린 개발론자들은 설악산 사례를 보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게 오히려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대할 가치가 없어 보인다. 아무튼 현재의 한라산은 피곤에 절어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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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4월 26일 속밭 대피소 |
| ⓒ 안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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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4월 26일 사라오름 산정호수 |
| ⓒ 안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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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4월 26일 사라오름 산정호수 |
| ⓒ 안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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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4월 26일 사라오름에서 본 한라산 정상부 |
| ⓒ 안호용 |
완만한 경사면이 양 옆으로 날개를 펼쳐있고 중간에 한라의 동봉이 화룡점정처럼 볼록 솟아 있다. 그 사이 공간에는 구상나무, 참빗살나무, 굴거리나무, 산뽕나무, 그리고 멸종 위기에 놓인 눈향나무와 고목이 된 앙상한 주목 등이 모진 풍파에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고, 말썽 많은 조릿대 무리가 그 나무 군락을 잠식하고 있다.
한라의 자태에 잠시 취해 있던 시선을 능선을 따라 아래로 옮기면 멀리 작은 건물들이 흐트러진 레고 조각처럼 보이고, 그 뒤로는 드넓은 바다가 시야를 압도한다. 제주에서는 항상 바다와 한라산이 눈에 띄지만 이렇게 두 풍경을 적당한 거리에서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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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4월 26일 사라오름에서 본 제주 풍경 |
| ⓒ 안호용 |
예전에 수많은 봉우리에 올라가 보았지만, 봉우리에 오르지 않아도 아웃도어의 행위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언젠가 나는 깨달았다. 김민기가 되뇌었던 '봉우리'가 아니더라도 봉우리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봉우리도 산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사실 처음엔 사라오름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첫 만남에서 반해버리고 말았다. 한라 대오름의 거대한 품에 안겨 있는 사라의 모습은 윗세오름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비록 대오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산정호수와 더불어 대오름에 대한 조망자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 사라의 몸에 기대어 장대한 한라를 올려다본다. 그것만으로도 사라의 존재는 충분히 제값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불멸의 존재처럼 한라의 동봉은 하늘에서 우리를 계속 내려다보고 있다. 그 시선을 느끼는 가운데 산상만찬을 즐긴 나와 일행은 데크 바닥에 누워 두 발을 전망대 목재 울타리 중간에 올려놓고 눕는 퍼포먼스를 취한 후 하산길에 나섰다.
이 퍼포먼스는 처음 사라오름에 가자고 한 도반이 제안한 것이었다. 사라오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이제야 소원을 풀었다는 듯 감격하는 눈빛이 역력했었다. 그리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런 퍼포먼스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가 사라오름을 동경하게 된 배경을 모르지만 그의 감동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제 올라올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내려가고 있었다. 나와 일행은 그들에 섞여 열심히 두발을 놀렸다. 하산하는 도중 사라의 매혹적인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영원 속에 간직할 것처럼 깊게 부조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세계를 가슴에 품고 내려가는 나의 두 다리는 한결 가벼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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